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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May 18. 2016

바람이 곧 제주임을 알려준 곳_
어승생악

한라산을 느끼기 좋은 또 다른 선택

등산으로 쌓인 피로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약간의 산책은 몸을 푸는데 더 도움이 되지 싶다. 잠을 청하기 전 지인과의 메시지를 통해 내일 가벼운 산책을 합의했다. 오전 일찍 가자고 합의하고는 잠을 청해 보지만 쉽지 않다. 혹시 저녁에 먹은 '비타 500'의 효과인가 도무지 각성이 되어서인지 잠들기가 쉽지 않다.


비몽사몽 간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날이 밝아왔지만 연락이 없다. 그러다 다시 잠들다 깨기를 반복하다 10시가 넘었다. 이러다 오전 시간 다 가겠다 싶어 전화를 걸어 갈길을 재촉한다.


창문 밖에는 바람이 한가득이다. 지난번 윈드시어 발령 때만큼이나 강한 바람이 분다. 만만치 않은 날씨다. 어디를 향할지 후보지를 두 군데로 압축했다. 가벼운 어승생악이거나 조금 노력이 필요한 노꼬메오름. 주저 없이 좀 더 편안한 어승생악으로 방향을 잡는다.


1100도로 쪽으로 방향을 잡고 어승생 승마장 앞에 다다르자 함께 간 지인이 차를 승마장 주차장에 세웠다. 바람은 여전히 세상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기세로 서있는 모든 것을 잡아채고 있지만 하늘의 날씨는 무심하기만 하다. 멋진 구름을 만들며 인간들의 하루를 기념해준다.


제주에 살면서 저 같은 구름을 보기란 쉽지 않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자연의 대단한 잔치를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터였다. 하늘의 구름과 나무를 스마트폰으로 잡는 사이 뒤편의 말 한 마리가 무슨 일인가 나를 향해 걸어 나온다. 녀석도 무언가 궁금했는 모양이다.


바람과 구름이 만들어 놓은 장관. 어승생승마장 입구에서

어리목 휴게소는 그다지 멀지 않다. 윗세오름에서 내려오면 지친 마음으로 지나치던 안내소에 다 달아 차를 세우니 바로 코앞이 어승생악 탐방로다. 옆으로 난 길이 아주 정비가 잘 되어있는 가벼운 산책길 정도의 느낌이 든다. 


사실 꽤나 높은 오름이거나 한참의 품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작부터 이미 잘 닦여진 곳이기에 산책길이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구름을 만들며 인간들의 하루를 기념해준다


오르는 길부터 주변에 조릿대가 한 가득하다. 다른 어느 곳보다 더 심하게 조릿대가 번성하고 있다. 조릿대 논쟁이 생각났다. 한라산의 조릿대가 이상 번성 현상이므로 이를 어떻게든 조절해서 줄여야 한다는 생각과 이전의 기록을 보면 조릿대 번성의 기록이 있으므로 자연스러운 한라산의 모습이라는 논리.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제주에 내려온 첫해 겨울 삼다수 숲길을 찾았을 때 온 숲길이 조릿대로 무성하던 생각이 났다. 낯설고 이상하다는 생각이었다. 

어승생악에 대한 백과사전의 설명이다.


御乘生嶽  높이 1,169m이다. 한라산 정상에서 북서쪽 약 6km 지점에 있으며, 제2횡단도로에 면한 모식적(模式的)인 코니데(圓錐)식 화산이다. 정상에는 둘레 약 250m가량의 분화구 자리가 있다.

부근의 어리목은 한라산 등산코스로 유명하다. 북서쪽 2km 지점에 제주시의 식수를 공급하는 어승생 수원지가 있다. 조선 정조 때 이 오름 밑에서 용마(龍馬)가 탄생하였는데 당시의 제주목사가 이를 왕에게 봉납(奉納)하였다 하여 어승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두산백과)


오르면서 어승생악은 조릿대와 더불어 특이한 형상의 나무를 많이 보여준다. 무엇보다 바위에 붙어서 뿌리를 바위에 감싸는 나무가 곳곳에서 보인다. 특별히 바위를 감싸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바위와 함께 붙어있으며 좀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려나. 암튼 상당히 그로테스크한 바위와 나무들의 결합을 보면서 이곳에는 다양한 두르이드들이 함께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황당한 상상도 해본다. 이런 곳을 거닐면서 할 수 있는 상상이 가능하다는 것은 나쁘지는 않다.

두르이드를 생각하게 하는 이유는 위 사진처럼 넝쿨이 나무들을 얽어매며 특이한 자생을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뜻 바라봐도 곧 나무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모습니다. 칭칭 엉킨 줄기 어딘가에 불쑥 얼굴을 드러낼 것 같은 생각은 나만의 아닐 것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바위와 함께 붙어있으며 좀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려나


다시 조릿대 사이로 다 자란듯한 고사리인지 고비인지 하는 식물들이 쭉쭉 뻗어 생존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고사리가 맞지 싶다. 나는 저 식물을 볼 때마다 어디선가 중생대의 작은 공룡이자 떼 지어 사냥을 하는 벨로키랍토르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하게 된다. 공룡영화에 많이 익숙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공룡시대를 묘사하는 책들의 그림을 보면 그 공룡은 고사리나 고비가 번성한 숲에서 뛰쳐나와 사람을 잡아먹곤 한다. 

암튼 어승생악을 오르는 숲은 다양한 상상을 가능케 한다. 짧은 거리이자 그다지 심한 운동량을 요구하지 않는 관계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어 다행이다. 


이윽고 정상이다. 다른 무엇보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정상까지 올랐지만 숲 속에서는 그 강도를 느끼기 쉽지 않았다. 정상에서는 다르다. 숲이 움직이다. 산이 움직이며 어디로 장소를 옮기나 싶다. 소리를 낸다.


바람이 제주다. 허공으로 뛰어오르면 날아갈 것 같다. 바람이 차지는 않지만 그 세기는 사뭇 다르다.

구름이 몰려들면서 앞에 Y계곡이 선명하게 두드러진다. 덕분에 윗쪽의 만세동산과 윗세오름은 잠시 숨었다.

정상에서 보이는 풍광은 위에서 내려보거나 아래에서 쳐다보는 한라산과는 사뭇 다르다. 일단 어리목의 계곡이 보인다. 흔히 Y계곡이라고 일컫는 곳과 만세동산, 그리고 그 너머의 윗세오름이 보인다. 다시 구름에 가려 밑에만 보일 뿐이다. 


거센 바람은 구름을 어디론가 빠르게 몰고 있다. 마치 누군가가 군불을 지피고 피어나는 연기를 부채로 몰아내는 모양새다. 산 너머 저쪽에서 누군가 군불을 지피는가.


그 덕에 한라산은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을 계속해서 선보인다. 이 무슨 호사란 말인가. 바람이 제주에서 만들어내는 아주 극적인 장면들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가 군불을 지피고 피어나는 연기를 부채로 몰아내는 모양새다


숲이 움직이는 모양과 소리가 들린다. 어승생악은 저 바람에 밀려 한라산 주봉 옆에서 이리로 밀려온 것이 아닐까. 지금도 아래로 아래로 움직이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를 느낄 수 있는 숲이 움직이는 모습이 극적으로 보인다. 숲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숲 속의 거대한 바위는 나무를 방패 삼아 좀 더 주저앉기 편안한 장소를 찾아 떠도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숲의 정령이 사주경계를 하고 있거나.

시시각각 몰려들었다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이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다.
제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그 덕에 바람과 산과 바다와 구름을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내려가기가 못내 아쉽다. 정상을 2바퀴 돌고 제자리에 다시 섰다. 단지 어승생악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들이다. 


봉우리 끝자리에 불쑥 솟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일제시대 최후 전투를 위해 지어놓은 진지란다. 미련스럽다. 이렇게 아래가 잘 보이는 곳에 진지를 짓는 것은 알겠는데 역으로 다른 쪽에서도 너무나 잘 보이는 위치가 아니던가. 폭격하는 입장이라면 가장 먼저 대상으로 삼을 곳이다. 


암튼 안에 들어가 보니 총을 겨누며 아래를 볼 수 있는 진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너무 눈에 띄는 곳에 만들었다는 전술적 미비점에 대해서는 물러설 수 없을 만큼 너무 노출되어 있다.


바람이 제주에서 만들어내는 아주 극적인 장면들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근데 이곳이 정상인데 분화구는? 어라 이제야 저 아래 분화구와 그곳 못에 모인 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모든 감각을 상실케 하니 여기가 일상적인 산봉우리가 아니라 분화구의 한쪽 꼭대기라는 사실을 잊었다. 제주의 오름은 기본적으로 분화구라는 점을 말이다.


어승생악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이곳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그저 그런 오름의 안쪽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의 본질이 바람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 어승생악을 오르고 나니 제주의 심장에 온 느낌을 받는다. 


바람 부는 날에는 어승생악에 올라봐도 좋을 듯하다. <끝>

일제시대에 만들어놓은 군사진지
어승생악 정상부가 분화구임을 알려주는 모습. 아래쪽에 못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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