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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온 곳은 떠날 곳으로, 여행은 행려로

[문장을 부르다: 생활인의 인생 인용문 45편] 4장. 배움과 전환

by 임재훈 NOWer



[문장을 부르다: 생활인의 인생 인용문 45편]


4장. 배움과 전환

— 새로 얻은 생각, 다시 뜨는 눈






45 여행자.jpg 이미지 출처: 알라딘


떠나온 곳은 떠날 곳으로, 여행은 행려로


“당연한 말이지만, 여행자가 없으면 여행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칭팡 지음, 이점숙 옮김, 『여행자』, 북노마드, 2014, 112쪽)


그곳을 떠나 이곳에 왔는데 머잖아 저곳을 바라본다. 떠나온 곳은 이번에도 정착지가 되지 못하고 또다시 떠날 곳이 된다. 유목민과 여행자의 삶이다. 생활인들이라고 다를까. 발령과 이직, 장기근속과 정년퇴직, 운영 중인 매장의 이전, 기존 거래처와의 계약 만료, 새로운 일거리의 착수 등 일과 일터의 변동, 전월세 계약 만료 또는 이러저러한 생의 사유에 따른 이사는 다반사다. 유목민과 여행자가 그러하듯 생활인 또한 한곳·한철·한창때에 평생 머무르지 않고 계속 이동한다. 멈춰 있는 듯 보이는 이도 실은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을지 모른다. 새집에 오고도 이삿짐을 다 풀지 않는 세입자처럼.


“여행자가 없으면 여행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의 실없음에 피식 웃다가, 이내 자세를 고쳐 앉고 책을 힘껏 말아 쥔다. 하나 마나 한 얘기 아닌가 싶었던 한 줄의 글에서 내 삶이 읽혔기 때문이다. 책이 이미 나를 다 읽은 기분. 그때 나는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캥거루 족의 생애 첫 독립이었다. 이십 대였다면 마냥 설렜었을까. 삼십 대 후반이었던 내게는 두근거리는 심장보다 전전긍긍하는 머리가 더 실체적으로 다가왔다. 처음으로 혼자 살아 본다는 달뜬 기대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런 감정에 한껏 취하려고 보면 머릿속에 ‘네가 지금 그럴 때야? 그럴 나이야?’ 하는 힐난이 차올랐다. 마음놓고 좋아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자기 검열이었다.


그래서 건사해야 할 앞날을 걱정했다. 내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설렘을 제쳐두고 불안에 더 집중했다. 다달이 들어갈 생활비, 새로 장만해야 할 가전제품 목록과 예산, 현재 급여 수준에서 운용 가능한 여윳돈 등을 계산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이사하기가 싫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없으면 이사도 독립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계속 ‘있으려면’ 떠나야 한다. 『여행자』의 문장을 빌려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막상 새집에서 첫 밤을 보내니 불안 따위 다 사라지고 두근거림에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 정도로 좋았다. 이제야 부모님 품을 벗어나 진짜 어른이 된 듯해 뿌듯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첫 관리비 고지서와 신용카드 결제 내역서를 확인했다. 심장의 설렘 펌핑이 덜컥 끊겼다. 부모님과 동거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정 지출 금액에 망연자실했다. 그렇구나, 앞으로 이만 한 돈을 매달 내면서 살아야 하는 거구나.


그러고서 또 몇 달이 흘렀다. 통장 잔고에서 다달이 빠져나가는 액수가 그새 익숙해져서, 간사하게도 집에 들어오는 일이 날마다 기뻤다. 한밤중 혼자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캥거루 시절에 펼쳤던 『여행자』라는 책을 설렁설렁 마저 읽다 그대로 잠들고는 했다. 침대 가서 자라, 씻고 자야지, 옷은 갈아입고 누워야지, 먹자마자 바로 누우면 어떡하니, ⋯⋯. 그 시간쯤 매번 날아들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를 이제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 건 『여행자』의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이었다. 그곳에 “보잘것없는 여행자인 나는 그동안 여행했던 세계를 설명해 낼 능력이 없다.”와 “나는 스스로가 기댈 수 있는 가치를 찾아 다녔다.”(308쪽)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후로도 심장은 두근거림과 덜컥임을 반복했고, 그것의 주인인 나는 한차례 근무처를 옮겼다가 결국 회사원에서 프리랜서가 되는 생활의 변화를 맞았다. 여행에 관한 책을 자주 붙들었다. 실제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기보다는 나의 살아감 자체를 여행으로 바라보려는 의도가 더 강했다. 그래야 이미 지나온(잃은) 것들을 좀더 수더분히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듯.


“이런 등반의 묘미란 꼭 선(禪)과 같다는 거야.”(잭 케루악 지음, 김목인 옮김, 『다르마 행려』, 시공사, 2015, 97쪽)라는 소설 속 인물의 말을 눈여겨 읽고 귀담아 들었다. “생각을 하지 마. 그저 춤의 리듬에 맡겨. (⋯) 귀엽고 조그만 문제들이 매 스텝에 드러나는 법이지만 절대 망설이지 말고 너만의 돌들을 찾아. 돌을 선택할 때는 그저 선처럼 어떤 특별한 이유도 찾지 말라고.”(앞의 책, 97쪽)


‘여행’을 한자어 그대로 직역하면 ‘나그네(旅)가 가다(行)’라는 의미다. 뒤집으면 ‘행려’다. ‘나그네가 되어 돌아다님. 또는 그런 사람.’ 여행의 나그네는 이미 여행자로 살아가는 이를, 행려의 나그네는 ‘새로이 혹은 또다시 여행자가 된’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여행이 행려로, 행려가 여행으로 뒤바뀌듯, 내가 정착지라 믿었던 시공간도 언젠가는 지난날의 여행지로 남을지 모른다. 나날의 일상과 경험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부 여행이며 여행지다. 결국 다 지나갈 것들이므로. 뒤를 돌아보는 포즈와 앞을 향하는 시선이 언제나 일치하는 여행자처럼, 하루하루 ‘나만의 돌’을 묵묵히 모으며 나아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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