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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부르다] 발문

[문장을 부르다: 생활인의 인생 인용문 45편]을 마치며

by 임재훈 NOWer


읽다가 멎는다. 읽기를 멈춘다. 술술 페이지를 넘기다 어떤 한 문장을 만난다. 문장에 걸린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별안간 신호등과 맞닥뜨리는 기분. 문장이 어려워서 멎고 문장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켜서 멈춘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기까지는 한참 걸린다. 짧게는 하루나 이틀, 길게는 일주일이나 한 달. 겨우 다음 문장,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지만 또 다른 문장이 버티고 서 있다.


자꾸 멈춰 세움으로써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자각을 유도하고, 매번 새출발을 하도록 독려해 줄 문장들. 느리게 읽는-살아가는 이를 지속적으로 멎게 하여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의 속도를 똑똑히 체감하고 계속 그 빠르기로 읽어-살아 나가도록 유지해 줄 장치.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도로 위 정체 구간처럼 손 안의 책은 먼길이다. 책 속에 있다는 그 길이 굼뜨게 열린다는 것은, 그 길이 나의 길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신호다.


잘 멎고 멈추는 이들은 다독가가 되기 어렵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명서 1,000권’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다. 살아가는 동안 500권의 독서량조차 못 채울 가능성이 크지만 그럼에도 느릿느릿 책 속의 길을 간다. 자동차로 따지면 시속 30킬로미터 이하라고 해야 할까. 그런 속도로도 어떻게든 명절날 고향집에 당도하고, 자기 손 안의 책을 읽어 내고, 자기 삶을 살아 낸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도 아니다. 멎고 멈추면서도 틀림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감질나게 조금씩만 가까워지는 목적지, 그 마지막 페이지는 나의 뇌리에서 그 어떤 현실의 물상보다도 강렬한 형태로 존재한다. 빨리 도착하고 싶다! 얼른 결말을 알고 싶다! 그러나 장거리 주행이고 심지어 서행해야 한다. 길 위에, 페이지 위에 오랜 시간 머무르다 보면 가 닿아야 할 목적지-페이지를 잊기 일쑤다.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어 있던, 내가 가 닿고자 했던 그곳의 이미지는 점차 흐릿해진다. 분명 전진하고 있음에도 전혀 나아가지 못한다고 믿게 되는 착란. 그렇게 진짜로 멎어 버리고, 움직이면서도 정지해 있는 사태를 스스로 초래한다.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 즉 멎고 멈추고 머무르는 동안에도 ‘감각’을 열어 두기. 정체 구간을 잘 견뎌 내게 해 줄 ‘보고 듣고 느낄 대상’을 찾아 동행하기. 꽉 막힌 귀성길 차 안의 동승한 배우자와 자녀, 교통 안내와 노래가 흘러나오는 카스테레오 또는 스마트폰처럼. 이 책이 소개한 45편의 문장들을 독자 여러분께서 시속 30킬로미터 이하로 달리는 차 안의 식구들과 음악 방송 같이 지난한 기다림을 상쇄해 주는 또 다른 감각으로 여겨 주신다면 좋겠다.


책을 천천히 읽는 분들, 읽다가 자주 멎고 멈추는 분들, 독서와 비슷한 속도로 삶을 살아 내는 분들께서 이 책을 아주 느리게 읽고 오래도록 추억해 주시기를 소망해 본다.


2025년 2월 13일 새벽, 봄을 기다리며.

저자 임재훈






그동안 『문장을 부르다: 생활인의 인생 인용문 45편』(연재 기간: 2025. 1. 16. ~ 2. 13.)을 애독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느리게 읽고 살아도 충분히 나다워질 수 있고 자족할 만한 시절이 우리 일상에 스며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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