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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어른으로, 우상은 친구로

[문장을 부르다: 생활인의 인생 인용문 45편] 4장. 배움과 전환

by 임재훈 NOWer



[문장을 부르다: 생활인의 인생 인용문 45편]


4장. 배움과 전환

— 새로 얻은 생각, 다시 뜨는 눈






42 김훈.jpeg 이미지 출처: 알라딘


아이는 어른으로, 우상은 친구로


“살아갈수록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 몽롱한 것들과 확실한 것들, 희뿌연 것들과 뚜렷한 것들은 뒤섞인다. (⋯)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은 ‘살아갈수록’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뒤섞여 있는 것이며,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들을 분별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김훈,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문학동네, 1995, 79쪽)


그 많던 우상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초중고, 대학 시절 내내 내 방 벽면과 스크랩북을 가득 채웠던, 각종 어록과 신문 및 잡지 기사의 주인공들은 이제 묘연하다. 갑자기 일시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학교를 네 번 졸업하고, 생활인이 되고, 착실히 돈을 벌고 쓰고 나이를 먹어 가는 동안 한 사람씩 자취를 감추었다. ‘우상 1 퇴장’ 혹은 ‘우상 2 짧게 한숨 쉬며, 암전’ 같은 지문(地文)이 내 삶에 적혀 있기라도 한 듯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차례로 무대를 내려갔다.


우상과 함께하던 나는 매사 확고부동한 아이였다. 내년과 내후년, 스무 살과 서른 살의 미래를 씩씩하게 그릴 줄 알았다. 그림마다 내 우상들의 늠름한 소묘를 꼭 추가했고, 그 아래로 그들의 이름과 명언을 낙관처럼 새겼다.


이십 대에는 ‘내 우상이라면 지금과 같은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를 스스로에게 자주 되물었고, 삼십 대 초반에는 ‘아무리 내 우상이라도 이런 상황과 저런 인간은 쉽지 않겠지’ 하고 끄덕이다가 중반을 넘기면서부터는 그냥 ‘ㅆㅂ⋯’ 하게 되었다. 우상들이 설파한 아름답고 숭고한 격언들은 내가 사회 생활 중 맞닥뜨려야 했던 무수한 ‘짜침의 순간들’에 제대로 호환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그렸던 미래의 풍경화에 남의 성명과 잠언만 잔뜩 적어 놓았다는 사실을. 정작 내 이름은 낙관으로 찍지 않았다는 실수를.


학창 시절을 통틀어 내가 가장 앙망했던 우상은 승려 법정(法頂)이었다. 다음의 구절이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늘 아침은 날씨가 화창하게 개어 덧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방청소를 한바탕 했다. 마침 FM 라디오에서는 비발디의 ‘봄’이 흘러나왔다. (⋯)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서 차를 한 잔 마실까 하다가 그만두고, 바하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다. 요요마의 연주. 며칠 전 광주 베토벤 음악실에서 녹음해서 보내온 것. 봄밤에 첼로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마음 한구석에 연둣빛 밀물이 고이려고 한다.”

(법정 지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샘터, 1990, 260쪽)


FM 라디오, 비발디, 바하(바흐), 광주 베토벤 음악실 같은 다분히 속세적인 단어들을 이리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성직자라니. 저녁 예불 후 요요마의 음악을 듣는 출가승이라니. 십 대 시절의 나에겐 큰 충격이었고 깊은 감흥이었다. 책 제목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저자의 ‘쿨함’에 매료되었다. 그 뒤로 법정의 책들을 무던히 읽고 또 읽으면서 어른의 삶을 준비했다. 법정의 문장들과 걸맞은 미래를 꿈꿨다.


막상 성인이 되고 보니 혼란스러웠다. 법정의 고매한 경구는 대체로 내 삶의 현장에 적용하기 어려웠는데, 그렇다고 그의 가르침이 그르다고 볼 수는 없었다.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은 다르다”(류시화 엮음,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법정 잠언집』, 조화로운삶, 2006, 87쪽)는 말을 긍정하면서도,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다른 날이다. 그런데도 어제와 같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비극이여. 캑.”(이외수 지음, 『아불류 시불류』, 해냄, 2010, 155쪽) 같은 글에 더 위로를 받고는 했다. 하지만 후자의 감성에만 기대어 살기는 또 싫었다. 대체 뭘 어쩌자는 것인지⋯.


그러던 시기에 읽은 소설가 김훈의 문장은 확실한 교통 정리 역할을 해 주었다. 이것과 저것이 “‘살아갈수록’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 애초부터 그것들을 분별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반문. 삶은 고아함과 ‘짜침’이 뒤섞인 세계이고,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무엇이 고아하고 또 무엇이 ‘짜치는지’ 구분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미래를 선택적으로 취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업이었다는. “모호한 것들과 명석한 것들, 몽롱한 것들과 확실한 것들, 희뿌연 것들과 뚜렷한 것들”을 누가 뭐래도 나의 의지로 통과하는 수밖에 없다는.


한때 내가 그린 미래의 주인이었던 우상들을 이제 ‘친구’로 재소환하고 싶다. 그들은 내 삶의 무대에서 퇴장했으나 새로운 배역으로 다시 나와 함께할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사귀려고 보니 아뿔싸, 나의 벗은 오래전 우상이던 시절에도 이렇게 일갈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멀쩡한 내 본래의 눈이 있는데 어째서 남의 눈에만 의존하려고 하는가.”(『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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