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락내력

[평일의 의식의 흐름. 여름] #8

by 임재훈 NOWer



말장난 같지만 올라가는 길은 오르막길뿐이다. 평지를 보행해 올라간다거나 아랫길을 내려가 윗길에 다다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데다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허튼소리다. 올라가야 하는 사람이 오름길을 거역할 방도는 자기 삶에서도 없을 거니와 이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르막길⟩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첫 소절을 괜히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로 지은 것이 아니다.

군 시절 오르막길을 행군할 때마다 고참이 잔소리를 해 댔다. “앞에 보지 마, 위에 보지 마, 바닥 봐 바닥, 땅만 보고 걸어.” 굽이굽이 까마득한 오르막을 응시하면 지레 질려 버릴 터이니, 아예 고개를 숙인 채 걷는 행위 자체에만 집중하라는 조언이었다. 퍽 효과적이기는 했다. 중대원들 다 같이 느림뱅이가 되어 수굿수굿 제 발밑만 노려보며 한참을 걷는데 중대장이 갑자기 소리친다. “다들 뒤에 봐 봐라.” 고개를 돌리니 내리막길이 펼쳐져 있다. 어느새 고갯길을 거반 넘어온 것이다. 몇몇이 환호한다. 다시 힘을 내서 남은 길을 힘차게 걷는다. 그러라고 뒤돌아보라 명령한 것이다. 앞과 위를 보지 말라고 한 선임이나, 대관절 뒤를 돌아보라고 한 지휘관이나 목적은 같다. 계속 가게 하는 것. 일순 퍼지는 으쌰으쌰 분위기. 하지만 어디에나 파티 푸퍼는 있기 마련. 어디서 작게 욕지거리가 들려온다. “올락내려 올락내려 ㅆㅂ.” 중사 계급을 단 부사관이다. 옆에서 동료 중사와 하사, 앳된 소위 두어 명이 낄낄거리며 저마다 욕을 보탠다. ㅆㅂ, ㅆㅂ, ⋯⋯. 얼마나 힘들면 발음이 다 샐까. 오르락내리락을 ‘올락내려’라고 하다니. 하기야, 직업 군인으로서 똑같은 행군 경로를 얼마나 반복해 오르내리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했을까.

시간이 흘러 전역을 하고, 복학해서 우연히 ‘그 말’을 또 접했다. 언어학 수업이었던 듯한데, 다양한 순우리말과 사전에 등재된 사투리를 배우던 중 ‘오르락내리락’의 제주 방언인 ‘올락내력’을 알게 된 것이다. 내 귀에 ‘올락내려’로 들렸던 그 말은 ‘올락내력’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중사는 제주 사람이었는지도.(혹은 진짜로 발음이 샜던 것일 수도.) ‘내력’이라는 입말에서 동음어 ‘내력(來歷)’이 떠올라서일까, 왠지 ‘올락내력’이 사자성어처럼도 들렸다. 지금까지 지내온 경로나 경력. 내력. 올락내력. 나의 올락(오르락)의 역사. ⋯뭐 이런 식으로 생각의 확장(또는 왜곡)이 일어났다. ‘력’은 또 ‘힘 력(力)’과 포개져서 어쩐지 ‘올락내력’이라 하면 ‘오르내리는 힘’을 의미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착시가 아니라 착청(錯聽) 효과라 해야 하나. 게다가 ‘ㅆㅂ, ㅆㅂ’ 거리던 새파란 군인들의 치기 어린 상말도 잔향처럼 계속 귀에 맴돌았다.

이런 언어적 체험 때문인지 오르막길 앞에서 종종 “올락내력 올락내력” 중얼거려 본다. 그때마다 오랜 낄낄거림이 늙지도 않고 내 눈과 귀를 간질이고는 한다. 걸핏하면 맞닥뜨리는 ‘올락’과 ‘내력’에 일희일비하지 말기, 오르막과 내리막이 실은 한 길임을 잊지 않기, 올락내력 ㅆㅂ⋯⋯, ㅎㅎㅎ, ㅋㅋㅋ.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서도 이렇게 낄낄거리기로 약속하기⋯⋯.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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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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