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봄] #20
오랜만에 술 약속이 잡혔다. 장소는 종로3가역 근처의 한 주점. 해가 부쩍 길어진 봄날이라 아무리 늦은 오후부터 첫 잔을 채우고 비운다 한들 체감상 낮술로 여겨질 듯했다. 4월의 훤한 예지랑날(늦은 오후를 의미하는 방언) 어두컴컴한 술집에나 앉아 있을 생각을 하니 뭔가 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일찍 가서 종묘 산책로라도 좀 걷다가 고갈비에 소주든 감자전에 막걸리든 먹고 마시든지 하자고 정했다. 종묘돌담길이라 불리는 세 개 코스 중 서순라길만(궁궐담장길, 동순라길은 다음 기회에) 완보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윽고 깜깜한 밤, 불룩한 술배만큼 무거워진 카메라를 걸머메고 하늑하늑 막차를 탔다.
주종과 메뉴, 사람들의 대화, 노래방에서 불렀던 곡, 무엇 하나 또렷이 남지 않은 이튿날 아침. 카메라 SD 카드에 저장된 몇 장의 서순라길만이 나의 4월 예지랑날 종묘에 대한 물증이다. 남는 게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라고 반성하며 지끈지끈 후회스러웠던 봄날의 숙취.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