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3
같은 행정구에 있더라도 지역마다 조경 양식은 천차만별이고 당연히 조경수의 수종도 다르다. 이런 차이는 특히 가을에 도드라진다. 나무들이 저마다 색을 발하고, 그 색색의 잎들이 떨어져 거리를 덮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을에는 나무들의 종류에 따라 각 동네의 색채가 달라진다. 사람의 퍼스널 컬러와 같은 동네의 ‘로컬 컬러’라 해야 할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은행나무들이 많다. 북한산 둘레길과 인접한 행정동이라서 숲길로 들어가면 알록달록 삼렬한 단풍나무들을 보게 되기는 하나, 평소에 주로 다니는 길은 아무래도 동넷집들의 사잇길이거나 보도블록이 놓인 인도다. 주택가와 도로변마다 은행나무들이 식수되어 있다. 가을철 평일에 돌아다니면서 가장 자주 감각하는 색상은 그러니까 노랑이다. 내가 체감하는 우리 동네의 가을 ‘로컬 컬러’는 바로 옐로.
동네 골목길을 걷는데 뭔가 노란 것이 내 주변시에 포착된다. 하마터면 은행나무겠거니 하며 그냥 지나칠 뻔했다. 과연 작동이 될까 싶을 만큼 허름한 자판기, 무려 종이컵 커피 자판기다. ‘고급커피’ 한 잔에 ‘300원’이라고 써 있다. 자판기에서 캔커피가 아니라 종이컵 커피를 뽑아 마셨던 적이 언제였더라. 군 시절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한 이십 년 넘었나. 게다가 건물 내부가 아니라 길가에 떡하니 놓인 종이컵 커피 자판기는 진짜 오래간만에 본다. 캔 음료 자판기였다면 이렇게까지 호들갑을 떨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또 희한하게도, 눈앞의 이 사물이 무슨 막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지는 않는다. 좀 놀라기는 했어도 ‘아휴, 난 또 뭐라고’ 하며 이내 평정심을 되찾는다. 버려진 털실 옷붙이인 줄 알았던 게 조금씩 움직거려 소스라쳤다가, 잠든 새끼들을 품은 어미 고양이인 걸 확인하고서 혼자 피식거리듯.
그것이 여기 있다-있었다, 라는 사실이 내가 한정적으로 감각하고 있던 풍경에 파동을 일으킬 법도 한데, 그저 잔잔하고 잠잠할 따름이다. 아주 능청스럽게 내 시야각을 비집고 들어와 제 존재를 스리슬쩍 추가한다. 나는 알고도 당한다. 딱히 싫지 않다. 보고 있으면서도 못 봤던 ‘숨은 그림’을 찾은 기분이다. 은행나무와 같은 노란색이 아니었다면, 이 계절이 가을이 아니었다면, 종이컵 커피 자판기가 내게 그런 ‘숨은 그림’일 수 있었을까.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