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의 계절

[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2

by 임재훈 NOWer



고추 재배 기간은 약 반년이다. 초봄에 파종을 하고 꽃샘추위와 늦서리를 피해 5월께 모종을 정식(定植)하면 여름에 하얀 다섯잎꽃이 피어난다. 얼핏 보면 ‘미니어처 백합’ 같은 느낌이다. 백도라지꽃이랑도 좀 닮았다. 개화 후 보름 남짓만 기다렸다 7월에 풋고추를 수확하거나, 달포를 훌쩍 넘겨 9~10월에 홍고추를 따기도 한다. 빨간 고추를 보려면 가을까지는 진득히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동네 주택가 골목 곳곳마다 화단이 즐비한데, 가을에는 가지각색 꽃송이와 꽃가지 사이로 홍고추가 탐스럽게 무르익는다. 새빨간 원색의 강렬함 때문인지 화단 앞을 지날 때마다 고추한테 시선을 빼앗기고는 한다. 그런가 하면 홍고추 여남은 또는 스무남은 알을 펼쳐 담은 채반도 흔하게 보인다. 가을볕을 쬐고 색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말라 가는 고추는 점차 가마발간 빛을 띠게 된다. 이렇게 자연 건조를 하면 곰팡이가 슬지 않아 오래 보관할 수 있고 감칠맛까지 더해진다고 한다. 말린 햇고추를 ‘햇건고추’, 햇볕에 말린 고추를 ‘태양초(太陽椒)’라 한다. 이렇듯 따로 부르는 낱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추 말리기라는 일이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익숙한 가을철 일상이었음을 방증해 준다. 내 손으로 심고 수확한 고추를 내 집 앞에서 직접 말리고, 볕 잘 스민 건고추들을 다시 집에 들여 가루로 빻고 장으로 담가 한참동안 아껴 먹기.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매해 가을마다 세워 보는 계획이다. 언젠가는 꼭 실천하리라.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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