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멍, 나무멍

[평일의 의식의 흐름. 여름] #17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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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피우는 게 허락된 야영장에 간다거나 단체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노는 행사에 참여할 일이 없다 보니 ‘불멍’은 내 일상에선 불감생심이다. 아쉬운 대로 동네 돌아다니며 ‘풀멍’과 ‘나무멍’으로 자족한다. 벤치에 앉아 풀숲이나 나무 한두 그루를 불 보듯 빤히 응시한다. 그러면 이내 멍해진다. 오래전 봤던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요가 수련을 열심히 한다는 여배우가 이런 말을 했다. 명상을 할 때, 이마의 한 점에 물방울이 느리게 똑, 똑, 떨어지는 상상을 한다고. 언어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 배우의 이마와 눈두덩, 콧망울, 인중, 입가에서 물기운이 느껴졌다. 막 세수하고 나온 얼굴처럼 이목구비와 피붓결이 해말끔했다. 워낙 인상적이어서 나도 따라해 봤었다. 방바닥에 가부좌하고서는 똑, 똑, 낙숫물이 내 이마를 타고 온 얼굴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한 오 분이나 버텼을까. 진득히 앉아 있지 못하고 결국 벌렁 드러눕고 말았다.

풀멍, 나무멍은 야외에서만 가능하므로 공중도덕 차원에서 내 몸을 함부로 놀릴 수 없다. 이런 제약을 역이용해서 예전에 실패했던 명상을 종종 재시도해 본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여름철이라 아무래도 쉽지는 않다. 물방울을 똑, 똑, 떨어뜨리려다 결국 땀만 뺀다. 이마뿐 아니라 온몸이 다 젖는다. 배우의 자기 관리란 역시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하여간 쓸데없이 체내 염분을 쏟으며 싱검쟁이나 되다가 시간이 훅 가기 일쑤다. 집으로 돌아갈 무렵엔 완전히 싱거운 인간이 되어 있는데, 이런 헛일도 자꾸 되풀이하니까 성취감이 생긴다. 어쨌거나 잡생각 안 하고 눈앞의 풀과 나무만 바라보는 데 성공했다, 라는 괴상한 만족감. 자극적인 감정들이 몸 밖으로 다 배출되었다는 자기 암시. 꾸준히 싱거워져야겠다는 다짐.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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