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5
배부른 소리 같지만 나날의 한량 놀이가 늘 기꺼운 것은 아니다. 내 경우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 꼴로 울적해지는 것 같다. 가을에 특히 심하다. 아침저녁 선선한 가을 공기를 마시려고 집을 나서면, 오전 오후 일고여덟 시 무렵 버스를 오르내리는 오피스룩 차림의 승객들과 백피스족을 자주 보게 된다. 누구는 분주히 출퇴근하는데 나는 이렇듯 느긋하게 산책이나 하고 있다, 라는 명징한 대비가 나를 얼마간 우울하게 한다. 세미 포멀 차림에 브리프 케이스나 토트백도 챙긴 번듯한 남녀 사이로, 반소매 상하의(가을이긴 해도 한두 시간 걸으면 땀이 난다.)에다 가벼운 바람막이 한 벌만 손에 쥐고 나온 내가 총총 걸어간다.
이른바 ‘IMF 시절’이었던 1997~1998년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당시 텔레비전 채널마다 실직한 가장들을 다룬 극화가 쏟아졌던 걸로 기억한다. 식구들에게 해고 사실을 숨긴 채 아침에 집을 나선 중년의 실업자들은 하나같이 산으로 갔다. 평일 근무 시간에 등산로 벤치에 점점이 앉아 멍하니 산아래를 내려다보던 아저씨⋅아주머니들의 꾸부정한 모습. 그분들을 부감 숏으로 잡아 세상이 별안간 쑤셔 넣은 삶의 휑한 공터를 얄궂게 부각하던 카메라 무빙.
나이 마흔에 실업자 신세가 되고 나니, 오래전 그분들이 아침부터 왜 산으로 들어갔는지 알 것 같다. 마주치기 싫었던 거다. 멀쩡히 회사로 향하는 사람들이 죄다 ‘한때의 나 자신’을 비추는 전신 거울이었던 거다. 행복했던 과거만을 비추는 거울은 메두사의 눈과 같아서, 마주치는 순간 돌로 굳고 만다. 산을 올랐던 그분들은 현실을 부정하려던 것이 아니라, 실은 스스로와 싸우던 중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굳지 않고 계속 움직일 에너지를 얻기 위해 인적 드문 산속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도 필요했던 것이리라. 한 분 한 분이 모두 페르세우스로서 자기 삶의 새로운 모험을 준비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침저녁 가을 산행은 어둑해서 좀 무서우니까, 나는 산 말고 카페로 간다. 손님들이 없고 조명을 아낀 작은 카페를 찾아 들어간다. 고양이가 저만의 ‘숨숨 공간’ 안에 웅크리듯, 평일의 고적하고 어두운 카페를 나의 은밀한 충전소로 택한다. 가을 햇살이 창문을 관통해 들어온다. 마치 탈주자를 수색하는 서치라이트 불빛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구석진 자리로 몸을 숨긴다. 언제나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오늘은 혼자 있기로 한다. 내 경우 타인들과 어울리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대부분은 내가 혼자 있을 때 채워진다. 다시 씩씩하게 당신들을 존중하고 응원하려면 오늘 나는 혼자여야만 한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