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8
오래간만에 차를 몰고 멀리 나갔다.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이다. 여행을 그리 즐기지 않는 데다 운전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서 웬만해서는 현 거주지의 행정구(서울특별시)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가깝든 멀든 자가용보다는 대중 교통을 선호하는 편이다. 이런 내향형 뚜벅이족의 이동 범위를 확장하는 동인은 대부분 외부 자극이다. 타인 A가 “어디 놀러나 갔다 올까?” 먼저 운을 띄우고, 곁의 타인 B가 “그래 그래 가자 가 버리자!” 호응하면, 이들과 동석 중이던 나도 덩달아(대개는 술기운에) “고고!” 외치게 되는 식이다. 이번 경우엔 대학 시절 후배 두 명의 즉흥 제안이 결국 늦가을 어느 평일 아침에 내 차의 시동을 걸었다. 세 사람 다 출퇴근 안 하는 프리랜서라 가능한 일이었다.
서해안과 인접한 모처에서 신나게 먹고 마시며 일박을 하고, 이튿날 아침 ‘아점’ 후 우리는 커피나 한 잔씩 하자며 적당한 장소를 골랐다. 그렇게 들른 곳이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이곳의 홍주읍성이라는 사적(史蹟) 내외에 산책로가 잘 형성되어 있어 잠깐 쉬어 가기 좋을 성싶었다.
홍주읍성은 이름처럼 조선 시대 고을인 홍주목을 방어하던 성벽이다. 목(牧)은 규모가 큰 고을을 이르는 옛 지방 행정 단위로, 최고 관리자는 목사(牧使)라는 벼슬로 불렸다. 지금으로 치면 ‘도’와 ‘도지사’라 해야 할까. 읍성(邑城)은 고을 전체를 둘러싸되 군데군데 문을 두어 내외부 드나듦이 가능한 축성 양식이다. 홍주읍성의 정식 명칭은 ‘홍성 홍주읍성’인데 ‘홍성군에 소재한 문화유산 홍주읍성’이라는 의미다.
이런저런 역사적 배경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배워 가며 자분자분 성내로 들어갔다. 다붓이 늘어선 조경수 아래로 갈빛 낙엽들이 야트막이 쌓인 풍경이 평일 오후의 그늑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성곽 따라 한 바퀴 다 걸어 볼 엄두도 못 낼 만큼 넓었지만, 돌벽이 감싼 사위를 눈으로 좇는 것만으로도 아늑함이 느껴졌다. 확실히 나는 이 안에서 안전하다, 라는 기분. 신기한 경험이었다.
성벽 위도 일반인 진입이 허용된 장소라 돌계단을 딛고 올라 홍성읍내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또 걸었다. 오래전 이 읍성에 복무했던 창병과 궁수는 눈 아래 고을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식사 배급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공성전의 기세로 쳐들어오는 적군들을 방어전의 결의로 몰아내야 했던 아군들의 싸움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누가 생존했고 누가 그렇지 못했을까. 내가 지금 발 딛은 위치에 섰던 이는 몇 살이었을까. ⋯⋯머릿속에 이런 상상을 펼치자니 문득, 내가 ‘나는 지금 조선 시대의 성 안에 있다. 그곳을 걷는 중이다.’라고 감각하며 거닐었던 성이 있었나 싶었다. 서울 한양도성의 일부인 종로구 창신동 낙산 성곽 길은 내게 그냥 데이트 코스였고, 경기도 수원의 화성 행궁 또한 그저 야경 좋은 관광지로만 체감했던 것 같다. ‘햐⋯ 한심하다⋯!’ 절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루(門樓) 양편으로 난 계단으로 내려오니 바로 맞은편에 카페가 보였다. 직장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드나들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한 시경이었다. 창과 활 대신 테이크아웃 컵을 쥔 현대인들은 읍성 외곽의 보행로를 따라 저마다의 집결지(아마도 근무처, aka 생의 전쟁터)를 향하여 느리게 걸어갔다.
그 카페에서 우리 셋은 커피를 사 마시고 사진 몇 컷을 찍고서는 차로 돌아갔다. 경기도에 사는 한 명은 홍성 기차역에 내려 주고, 차에 남은 둘은 서울행 고속도로로 들어가 한참을 달렸다.
이날은 목요일이었고 우리 셋 다 출퇴근을 안 하는 마흔 넘은 소년들이었다. 분명히 스물한 살, 스무 살이었는데. 대학 시절이 조선 시대처럼 까마득하다. 그래도 이렇게 차 타고 멀리 놀러 가기도 하는 애들 몇몇이 듬성듬성 내 소박한 일상을 둘러싸고 있다. 홍주읍성만큼 크고 견고하지는 않으나 내게도 나만의 ‘성’이 있다. ‘나는 지금 그 성 안에 있다. 그곳을 걷는 중이다.’라고 감각하며 쭉 아늑한 기분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과한 욕심이려나.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