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겨울] #9
간밤 폭설에 아침부터 동네가 부허옇다. 야틈한 가옥들이 눈안개에 푹 젖은 모습이다. 하늘을 메운 설운 무리가 해수면이고, 그 아래 내가 속한 이 풍경은 수중 세상 같다. 사위가 온통 깊숙이 갈앉은 형국이라 내려다보는 사람 심경도 약간은 까라진다. 산세를 가릴까 봐 낮게 지어진 집들. 마천(摩天, 하늘을 만짐)의 기세로 층층이 분양 건수를 쌓아올릴 수도 있었을 텐데, 산의 위의 앞에 그 물욕을 내려놓지 않았나. 그래서 이곳이 고도 지구 아닌가.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경고인가. 더 비우고 버리면 그때 다시 나타나 주마 하는 으름장인가. 산은 부유스레한 빙무(氷霧) 뒤에서 도통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네 잘못을 스스로 깨쳐라, 하고는 자취를 감춰 버린 스승님을 무작정 찾아 나서듯, 산을 보러 허둥지둥 눈세계 속으로 뛰어든다.
밤새 노면에 콱 박혀 얼어붙은 눈 위를 조심히 걷는다. 이렇다 할 목적지 없이 그냥 집 윗길로 쭉 따라 올라간다. 산체가 조망되는 고지대를 향해서. 설상가상 잠잠하던 눈발이 굵어지자 실없이 다급해진다. 종종걸음을 놓다가 몇 번인가 앞으로 뒤로 자빠질 뻔한다. 겨울 낮전에 설산 친견한다고 등등히 나온 참인데, 눈바람만 뒤쓰고 머쓱히 돌아가게 될까 봐 마음을 졸인다. 풍설에 행여나 카메라 상할 일도 걱정이다. 성탄절 아침에, 들이댓바람부터 이게 뭔 야단이람.
뒤세웠던 주택가 골목길이 까마득해지고 내내 낑낑댔던 고갯길이 서서히 편평해질 무렵, 눈앞의 장면이 느리게 화이트 인 된다. 부허연 눈안개 위로 마침내 산이 떠오른다. 산 보겠다고 온 놈은 나인데, 어쩐 일인지 나는 줄곧 가만히 있었고 산이 와 준 느낌이다. 아침나절 오두방정을 떨며 여기까지 올라온 시간이 일순 새하얘진다. ‘내가 말이야,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고생고생해서 저 산을 보고 내려왔다니까?’ 따위의 자랑질은 아무한테도 못할 것 같다. 나 자신에게도. 산이 와 준 거니까, 내가 뭘 한 게 없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억울하기는커녕 외려 마음이 편하다. 한참 만에 물 밖에 나온 듯, 산안개구름 위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본다. 차고 맑은 생초 향을 폐부 구석구석 몇 번이고 듬뿍 머금는다.
점처럼 작은 사람들, 희불그레한 십자가. 그곳에서 찬송가 몇 가락이 넘실대는 활승무를 타고 내 귓전까지 올라와 가분히 내려앉는다. 성일(聖日) 이른 아침, 산 앞에 선 마음과 성당 안에 모인 마음들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Merry holly jolly Christmas.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