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1

“그 시집의 첫 시 제목을 김(金)은 오랜만에 발음해보았다.”

by 임재훈 NOWer

중편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그 시집의 첫 시 제목을 김(金)은 오랜만에 발음해보았다. 안개, 안, 개, 아안, 개애, ······. 시어는 김의 입 안과 창문 없는 원룸텔 안을 맴돌고 겉돌다 점점 작아졌고, 결국 사라졌다. 사탕이 맹맛이라면 이런 느낌 아닐까.

그 시집을 만진 것은 이 년 만이었다. 두 단짜리 미니 책장 윗단에 놓인 시집을 쓰다듬을 때, 김은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길 말고 창문이 있었다면 책을 자주 열었을 거라고, 김은 표지에 그려진 시인의 캐리커처 위에 손바닥을 대며 선서하듯 변명했다. 시집은 냉랭했다.


가지런히 선 다섯 권의 책, 『마케터의 글쓰기』, 『잘 먹히는 검색 키워드의 디테일』, 『기업 블로그 콘텐츠 전략』, 『기업 커뮤니케이션의 맥락』, 『2014 오늘의 트렌드』 위에, 시집은 지붕처럼 뉘어 있었다. 이 년간이나 반듯이 닫혀 있던 책이었다. 시집을 인 서적들도 시집과 꼭 같은 햇수만큼 방치돼 있었다. 김이 다니는 회사의 복지 혜택이었던 도서 지원금 제도가 이천십사년 종료됐었다. 이 책들은 김이 이 년 전 마지막 지원금으로 산 직무 관련서들이었다.

책장 아랫단 사정도 윗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MY FRIEND WOOSUNG 2016.10 통권 제416호』, 『눈먼 자들의 국가』, 『나는 우성이 아니라 열성이었다 – 구우성 회장 스토리(2016 개정판)』. 이 세 권도 항시 닫힌 상태였다.

왼쪽의 사보와 오른쪽의 자서전은 현재 김의 담당 업무 클라이언트인 우성그룹 측으로부터, 둘 사이에 낀 책은 직장 상사였던 황 과장에게서 선물받은 것이었다. 사보와 자서전보다 판형이 작은 그 책은 번들넙죽한 양 두 권의 틈에 푹 잠긴 모양새였고, 책등 제목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문인 열두 명의 글을 엮은 산문집이라고, 봄에 그 일 있고 나서 만들어진 책이라고, 김 대리도 나도 그 누구도 절대 잊을 수가 없겠지만 잊지 않는다고 그만인 건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눈에 담고 입에 올려보면 좋겠다 싶어서 내 것 사는 김에 김 대리 것도 같이 샀다고, 이 년 전 이천십사년 겨울에 황 과장은 『눈먼 자들의 국가』에 부여한 의미를 김에게 공유했다.

김은 시집을 집어들었다. 이 년간 시집이 놓여 있던 자리에, 열려본 적 없는 『눈먼 자들의 국가』를 새 지붕으로 눕혔다. 그러고는 얼마간 앞표지를 내려다보았다. 바탕색은 직사각의 중앙 가로선을 기준으로 위가 하양 아래는 연파랑이었다. 상단 우측에 수동타자기 활자체 느낌을 낸 서체로 검고 얇은 제목 글자를 놓고, 하단 영역에는 비뚜름한 배 한 척을 그린 디자인이었다. 검은색 선박의 펀넬은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라고 적힌 말풍선을 매달고 있었다. 풍선 윗부분이 연파랑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형태여서 머잖아 배가 떠오를지 모른다는 상상도 하게 했다. 열두 문인들의 이름은 제목 아래로 한 줄에 한 명씩 쓰여 있었는데, 흰색과 엷파란 색에 각각 여섯 줄씩 놓이도록 정렬돼 있었다.

황 과장에게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 김은 표지의 꾸밈새를 어려워 했다. 지금도 여전히 난해했다. 열두 공저자의 이름 중 절반이 연파랑 안에, 즉 바다에 잠겨 있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제목에 ‘국가’라는 낱말이 포함된 만큼, 문인 열두 명이 ‘국민’을 상징하는 이름들로서 표지에 정렬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바다 안의 여섯과 바다 밖의 여섯은 국민 절반이 그날 바다의 구조자이자 희생자이기도 하다는 시각적 메시지가 되는 것인지, ······. 김은 이 년 전처럼 해석에 애를 먹고 있었다.

제목 또한 김에게는 난제였다. 『눈먼 자들의 국가』의 ‘의’가 소유격인지 ‘국가’를 수식하는 조사인지 헷갈리는 탓이었다. 이를테면 ‘노란 셔츠의 사나이’의 ‘의’인지, ‘사나이의 노란 셔츠’의 ‘의’인지가 모호했다. 국가 자체를 ‘눈먼 자들’로 규정한 것인지, ‘눈먼 자들’로 상징되는 특정 인물들이 국가를 독점했다는 것인지, ······. 김은 제목에다 괜한 시비만 걸고 있었다.

표지 전체를 차라리 파랑으로만 채운다면 어떨까. 사무실 디자이너들이 말하기를, 현 정부에서 사용하는 파란색과 가장 유사한 컬러코드는 #0064b9라는데, 이 색상을 『눈먼 자들의 국가』의 바탕색이자 바다색으로 정하면 어떨까. 책을 여는 실천은 없이, 김은 책장 위 파란 지붕을 상상해보았다.

윗단에 고정돼 있던 김의 시선은 이제 책장 전체를 훑고 있었다. 위아래 장서 기준이 명확해진 모양새가 김은 만족스러웠다. 이제 윗단 여섯 권은 이천십사년, 아랫단 두 권은 이천십육년 현재였다. 출간 연도별 분류가 더해진 책장 앞에서, 김은 발행 일자별 콘텐츠 카테고라이징을 마친 기업 블로그를 떠올렸다


대기업(우성그룹) 블로그 운영 대행 경력직, 2~3년, 사원급, 연봉 2200, 모집기간 2016.10.04(화)~16(일).

김은 식탁 위에 노트북을 열어 회사 홈페이지의 채용 관리 메뉴로 접속했다. 마감을 하루 넘긴 오늘자 신규 지원자, 성이 기(奇)인 이십구세 남자의 정보를 또 한 번 열람하기 위해서였다. 아까, 퇴근 무렵이던 밤 열 시쯤, 김은 지원자 기를 유일한 면접자로 골라 자신의 소속 부서인 기획실 실장에게 보고했었다.

‘110×150px’ 규격 안에서 기의 증명사진은 선명하게 멀었다. 기의 또렷한 얼굴은 작아서 멀어 보였고, 브라우저 창을 확대해보아도 거리감만 더 부각될 뿐이었다. 픽셀화된 원근감 안에서 얼굴은 가까워질수록 못 알아볼 형상이었다.

김은 성씨 어필로 시작된 기의 자기소개서 첫 문단을 거듭 재독했다. 기는 독립운동가 기산도, 양궁선수 기보배, 축구선수 기성용, 김의 책장 윗단 지붕이었던 그 시집의 저자명을 차례로 열거한 뒤, 이처럼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행주(幸州) 기 씨의 명예를 걸고 귀사의 재원이 되고자 한다는 포부를 끼워 맞췄다. 사무실에서 읽었을 때처럼, 김은 지금도 그 시인의 이름이 눈에 걸렸다.


네 캐리커처야. 내가 직접 그렸어.

얼굴하고 표정이,

그려놓고 나니까 이 시인이랑 너무 닮은 거야.

대리 된 거 축하해.


진급 선물로 시집을 준 선배, 그녀가 손바닥만 한 크래프트지에 작화한 자신의 얼굴, 그것이 끼워져 있던 책갈피, 삼심 쪽과 삼십일 쪽, 펼친 면 오른편인 삼십일 쪽에서 「오후 4시의 희망」이 시작되고, 첫 행은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이 시의 주요 시어들과 시적 배경은······.

잘못 불러오기 된 파일 같은 기억들을 김은 담담히 대하려 했다. 그래서 연관 검색 기능을 떠올렸다. 기 씨 성을 가진 지원자, 그의 자기소개서에 등장한 그 시인의 이름이 키워드들이었다. 연관 검색어를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처럼, 오늘의 키워드들로 인해 그 시집과 선배가 이 년 만에 불러오기 된 것이라고,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따른 결과값이라고, 동요할 필요가 없다고 김은 여겼다.

다시 책장으로, 김은 가고 말았다. 윗단의 이천십사년 여섯 권을 빼내자, 책들이 비워진 바닥에 몇 군데 구김살이 진 캐리커처가 납작히 누워 있었다.


2014年 1月 16日. 木曜日. 奇亨度를 선물하며.


한자를 곧잘 읽고 쓰던 선배의 필체가 선명했다. 크래프트지 하단의 이 문구가 김에게는 블로그 콘텐츠 게시일처럼 보였다. 선배가 발행한 마지막 제 얼굴을 내려다보며, 김은 또 불가피한 머릿속 불러오기를 수용해야만 했다.




연재 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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