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임신이었고 다시 첫아이였다.”
물 먹는 하마보다 스마트하네!
우성그룹이 추천하는 초미세먼지 먹는 식물 어벤져스
제목 첫줄만 우선 바꾸고 있으라고, 물 먹는 하마보다 스마트하다는 표현이 진부하다고, 물 먹는 하마 자체가 오래된 제품이라 시의성이 있거나 트렌디한 느낌이 아니라고, 다른 비유를 대체해보라고, 김은 기의 첫 원고를 모니터에 띄워놓고 일렀다. 기는 사수의 말을 수첩에 받아쓴 뒤 고개를 꾸뻑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부사수의 여전한 뻣뻣함이 신경쓰여서, 김은 말을 보탰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는데 괜찮은 것 같다. 잘 썼네. 오늘 입사하고 첫 불금이네.
기의 실무 투입은 수요일부터였다. 월화 양일간 김은 업무 인계와 분장, 클라이언트 전화 응대 매뉴얼 설명, 복합인쇄기나 제본기 같은 각종 사무실 집기 위치와 사용법 안내만으로 기를 붙들어 맸다. 월요일과 화요일 원고들은 김 혼자 처리했고, 그러느라 야근하는 동안에 기도 함께 남았다. 김은 이천십일년부터 이천십사년까지의 씨엠씨그룹 블로그 운영 자료, 현재 삼 년째 진행 중인 우성그룹 블로그 원고들을 한 폴더에 넣어 사내 파일서버에 업로드시켜두었다. 이틀간 기는 폴더를 통째 들이팠다.
식물 어벤져스는 우성그룹과 무연관성 원고였다. 그럼에도 본문에 세 번 이상 ‘우성그룹’이 반복 기재돼 있었다. 김은 부사수의 기본기를 높이 샀다. 딱딱한 자사 소식만으로는 블로그 방문률 올리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이른바 소프트 콘텐츠를 풀어먹는 것이 업계 관행이었다. 여행 및 패션 팁, 각종 실생활 노하우 등 가벼운 콘텐츠들로 방문 유입을 뽑아내는 전략이었다. 자사가 추천하는 특수 정보의 차림새여야 해서, 본문 곳곳에 해당 기업명이 검색 키워드로 삽입되어야 했다.
수요일 점심 먹고 지시한 원고를 금요일 출근하자마자 읽도록 보내놓았으니, 원고 한 건 공정에 하루 반나절이 걸린 셈이었다. 이 정도면 무난하다고, 두세 달쯤 지나 새 회사와 업무가 몸에 익으면 하루 한 건 수급도 무리 없겠다고, 김은 기대 이상인 부사수를 미더워 했다.
식물 어벤져스는 틸란드시아, 이오난사, 스파티필름, 산세베리아 슈퍼바 등 네 종이었다. 이게 공기 정화도 돼? 김이 원고 파일 본문에 삽입된 산세베리아 슈퍼바 사진을 손으로 짚었다.
네, 대리님. 음이온 발생률도 높고 야간에도 광합성을 한대요. 잘 때 머리맡에 두면 사람한테 좋대요. 연관 검색어로 공기 정화 식물, 미세먼지 먹는 식물, 딱 나오던데요?
그랬구나. 좋은 아이네.
원고 검토를 마칠 때쯤 기가 새 제목을 적은 수첩을 들고 왔다. 밀어서 잠금 해제보다 쉬운 물 줘서 먼지 해제! 김은 피식거렸다. 이걸로 수정해서 원고 넘겨. 잘 썼다.
기는 참조 주소에 김을 걸고 클라이언트에게 첫 메일을 보냈다. 내주 월요일 발행 예정인 원고 보내드리오니 검토 바랍니다. 첨부 파일을 확인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업무 메일은 매번 감사하며 끝낸다고, 기도 예전 회사에서 많이 감사했던 것 같다고, 김은 메일 내용을 확인하며 넘겨짚었다.
황 과장도 많이 감사했었는데, 첫 임신 때는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다고 그랬었는데, 두 번째 임신부터는 감사하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소리를 더 많이 했었는데, ······. 메일함의 ‘황 과장님’ 폴더 아래에 ‘기중민’이라고 새 폴더를 추가하며 김은 회상했다.
식물 어벤져스 검토 완료요. 이대로 월요일 오전에 발행 부탁드려요.
우성그룹 담당자가 모바일 메신저로 승인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요, 이따 저희 체육대회 때 삼십 분만 일찍 와주실 수 있을까요? 열두 시 반까지요. 신임 부회장님이 그 시간에 오신대요. 사내 행사로는 취임식 이후 첫 공식 일정이시거든요. 사진 촬영 각별히 신경써주시고요, 부회장님 위주로 많이 좀 찍어주세요.
기는 열한 시가 조금 넘어 나갈 채비를 했다. 출근 첫 주부터 야근하고 바로 취재까지 나가네. 정신없지? 카메라는 그냥 따로 들고 가지 그래? 백팩 안에 표준 렌즈와 광각 렌즈, 카메라 본체를 집어넣는 기에게 김은 몇 마디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대리님. 가방 여럿이면 더 불편해요. 김은 사옥 밖까지 부사수를 배웅해주었다.
네 시 좀 넘어 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신임 부회장님 일정이 변경돼서 뒤풀이 때 오신대요. 석식 같이할 겸 남아달라는데 현지 퇴근 괜찮을까요?
그래, 카메라 안 상하게 잘 간수해라.
월요일 오후에 발행해달래요. 주말에 대리님 메일로 초고 보내드리겠습니다.
고생이네. 끝나고 잘 들어가라.
감사합니다 대리님. 불금 보내세요! 대리님도 내일 광화문 가세요?
김은 못 알아들었다. 광화문역 우성그룹 사옥을 말하는 건가, 깜빡한 취재라도 있나, 갑자기 초조해졌다. 김은 휴대전화의 일정 관리 앱을 열어 이천십육년 시월 이십구일 칸을 살폈다. 아무 예약 없는 빈 토요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음 문자를 기다렸다. 기는 현장에서 바쁜지 더 잇지 않았다.
대리님‘도’ 가시냐는 기의 물음은, 혼자 소화해도 될 일정에 대해 상사의 동행 의향을 떠보는 의미일 거라고, 김은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빼먹었을지도 모를 내일의 빈칸에 불안해 하면서도, 차라리 기억나지 않는 채로 오늘과 주말을 편히 보내고자 했다.
퇴근 후 김의 머릿속에 광화문과 시월 이십구일 토요일은 사라져 있었다.
간단히 집 안 청소를 마친 김은 식탁 의자에 앉아 육백오십 밀리리터짜리 캔맥주와 시집을 열었다. 삼십일 쪽 「오후 4시의 희망」이었다.
책은 자꾸만 스스로 닫히려고 했다. 열린 자세를 의젓이 유지하지 못했다. 김은 운동량이 부족한 제 뻣뻣한 신체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칭하듯이 시집을 네다섯 번 구부렸다 펴주고는 다시 삼십일 쪽을 열었다. 조금은 오래 버텼지만 이내 또 닫혔다. 결국 김은 「오후 4시의 희망」 맞은쪽인 삼십쪽을 캔맥주로 눌러놓았다.
문진이 beer갈수록 나는 취한다, 중량감을 잃어갈수록 지면은 파닥거린다, 가벼워지는 쪽은 시집일 뿐, 비우려 취할수록 나는 무거워진다, 음주독서는 불법이라는 듯, 시집은 닫히고 책 속의 길은 더 이상 진입로가 아니다―
시도 아니고 펀도 못 되고 언어유희 자격도 없는 뭣도 아닌 말짓거리에 취해 있을 때, 캔 바닥에서 지면 몇 장이 풀썩 빠져나왔다. 나머지 장들도 곧 들썽이려는 조짐이 보였다. 김은 얼른 냉장고에서 새 맥주를 꺼내 삼십쪽에 올린 뒤, 오십 밀리리터쯤 남은 헌 술을 마저 비워 버렸다.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첫 행의 끝 어절 “무엇인가”와 둘째 행의 첫 두 어절 “생각해야 한다,”는 연이어 읽거나 틈을 두고 읽어도 되는데, 이런 시 쓰기를 양행걸침이라고 한다고, 너랑 내 관계도 양행걸침이기를 바란다고, 따로도 읽히고 붙여놓아도 썩 잘 읽히는, 각자의 행 안에서 단독하되 서로의 행을 예비할 수 있는, 그런 사이였으면 한다고, 선배는 먼저 고백했다. 김이 학사행정실에 전과 신청을 한 지 며칠 뒤의 일이었다. 호칭은 계속 선배로 하라는, 내가 선배인 걸 늘 상기해야 전과자라도 본적을 늘 기억할 것 아니냐는, 이 무리한 조건에 김은 흔쾌히 응했다. 오래전의 수락이었다.
「오후 4시의 희망」이 불러들이는 것들은 선배와의 과거만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벌어진 두 달 전 사건들도 연관 검색 결과처럼 묻어오고 있었다.
두 번째 임신이었고 다시 첫아이였다.
반드시 받아내야지. 솔직히 게먹을라치면 받고 못 받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당연히 회사가 해줘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김 대리?
오층 대표실에 부속된 인사지원팀으로 향하기 전, 황 과장은 결의하듯 말했다. 첫 임신 때도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라고 하려다 김은 말을 바꿨다. 꼭 해줄 거예요. 잘 다녀오세요. 삼십여 분 만에 돌아온 황 과장은 김을 데리고 일층 카페에 갔다.
못해준대. 이번엔 대표님이 직접 말하더라. 이유가 뭔지 알아? 사례가 없대. 임신휴직 비인가 사유가 사례 없음이면, 임신휴직 인가 사례 자체가 절대 성립될 수가 없잖아. 무슨 이딴 논리가 있어.
황 과장의 별명은 애봉이었다. 애봉이는 입사 후 김이 전 직원 연락처를 휴대전화 주소록에 저장하다 알게 된 이름이었다. 메신저 앱의 새 친구 목록에 뜬 황 과장의 프로필 사진이 못난이 애봉이었고, 김은 상사와 친해져볼 양으로 농을 건넸다. 하나도 안 닮으셨어요 애봉이랑― 황 과장은 킥킥거렸다. 똑 닮았다는 소리로 들린다고, 거짓말 잘 못하는 게 맘에 든다고, 남편이 좋아하는 웹툰에 등장하는 캐릭터라고, 남편이 나를 애봉이라 부른다고, 첫애가 딸이면 태명도 애봉이로 짓기로 했다고, 황 과장은 계속 깔깔댔다.
두 번째 애봉이라고 해야 할지, 다시 첫 애봉이라고 해야 할지, 김은 울먹이는 황 과장의 배를 내려다보며 뱃속의 애봉이를 생각했다.
위로조로 건넬 문장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언감히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가는 눈물보만 자극할 것이었다. 그러면 애봉이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김이 곤란해 하는 중에 계약직 바리스타 정은 씨가 유자차 두 잔을 내왔다. 서비스예요. 임신부한테 좋대. 남자한테도.
다음날 황 과장은 한 번 더 올라갔고, 울면서 내려왔다.
사례가 없어서 안 해준대 계속. 내가 첫 사례면 안 돼? 사층 파티션 속 머리들이 일제히 솟을 만큼 고성이었고, 사무실 음소거 정책 시행자인 실장이 주의를 주었다.
여기 회사예요!
사례가 없다는 말 못잖게, 단 두 어절만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정언 명령이라고, 김은 속생각했다. 사례가 없다는 말이,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례는 없다는 온 시제의 통합 완료형이듯, ‘여기 회사예요’라는 말 또한, ‘어디―여기 회사’라는 단일성 안에 육하원칙의 나머지 다섯 요소들을 수렴시킨 제일 원칙처럼 여겨졌다. 누가 언제 무슨 일을 어떻게 왜 겪었든, 회사라는 절대적 공간성 안에서는 무용한 상대성에 불과한 것이었고, 따라서 황 과장은 원칙상 묵묵무언이어야 했다.
실장은 커다란 구체 같은 배를 어루만지며 또 말했다. 황 과장, 회사예요 여기! 어순만 바뀌었을 뿐 동일한 의미인 이 말처럼, 황 과장의 애봉이 또한 첫 임신과 두 번째 임신이라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아이일 거라고, 정언명령이자 제일 원칙이자 운명인 태아임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고, 김은 실장의 배와 황 과장의 배를 쳐다보며 상상했다.
그 다음주의 오르내림이 마지막이었고, 불시 퇴사는 여섯 시 정시 퇴근보다 두 시간 빨랐다. 서서 우는 황 과장을 달래 앉히고, 김이 대신 자리 정리를 해주었다.
실장의 임신 이후 줄곧 멎어 있던 유선 스피커며, 김이 이사 선물로 받았던 것과 빛깔만 다른 머그잔이며, 오른손목에 종종 차던 보호대며, 그 밖의 갖은 잡동사니들이 종이박스 한아름에 담겼다. 김은 거대한 백업폴더를 이동시키는 기분이었다.
잘 낳고 잘 낫고 잘 살아야 하는데, 우리.
일층 카페에서, 황 과장은 배 부른 바리스타 품에 한참을 안겨 있었다.
나도 곧 나가잖아요. 예정일이 다다음달이라. 친한 남자 후배가 새로 들어올 거예요. 과장님 십삼주차랬지? 금방 불룩해진다 이제. 이번엔 진짜로, 불룩해질 거야. 아, 맞다.
바리스타는 황 과장 배를 쓰다듬다 손가락을 튕겼다. 곧이어 에스프레소 바 찬장에서 노란 유리병과 믹스 봉지 한 움큼이 꺼내졌다.
내가 담근 유자청이야. 가져가요. 난 또 있어 집에. 이건 유자 분말. 커피믹스처럼 생겼지? 남편한테 회사 가져가서 타 마시라고 해.
우리 오빠 제산제 먹느라 시고 단 차 못 마셔 언니. 김 대리 주자 이건.
사옥 외벽 앞에서, 황 과장은 박스를 내려놓고 파란색 도자기 화분을 건져 올렸다.
내 자리에 있던 거. 나 휴가 갔을 때 김 대리가 물 몇 번 줘봤잖아. 산세베리아 슈퍼바라고, 다육식물이야. 난 뭘 더 기르기가 겁이 나서···.
김은 맥주 캔들을 분리수거용 봉지에 담았다.
이제 시집은 내리누르는 무게 없이도 열린 자세를 잘 버텼다.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머그잔에 붓고 유자믹스를 개는 동안에도, 「오후 4시의 희망」은 미동이 없었다.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요사이 「오후 4시의 희망」은 김에게 새삼스러워져 있었다. “오후 4시”, “과장”, “울음”, “물”, “콘크리트” 같은 두 달 전의 키워드들이 한데 거두어진 듯했다. 온라인 공간 곳곳에 숨어 부지불식간 자동 검색돼 출몰하는 꼴이 아니라, 시 속에 얌전히 잠겨 로그오프 된 가짐새였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시구대로 김은 따라했다.
미지근해진 전기포트와 제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보았다. 양행걸침이라는 게 대충 이런 리듬이지 않을까 상상하며, 물줄기를 이었다가는 끊고, 다시 또 잇고, 놀이하듯 화분에 부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어쩐 일인지 유연해서, 닫히지 않은 지면에 김은 물을 몇 방울 흘렸다.
연재 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7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