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어두워요. 얼마나 어둡게 투명해요.”
지난주 금요일 우성그룹 사람들은 줄다리기, 이인 삼각 계주, 축구를 했다. 부서원들을 한데 섞어 네 팀을 짜고, 팀 대항 토너먼트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했다. 기업 로고 색상과 맞춘 빨강, 파랑, 초록, 보라 스웻셔츠로 팀 구분을 했다. 일등 팀에게는 회식비가, 현장 투표로 선정된 엠브이피 선수에게는 안마기가 하사됐다. 네 개 색이 모두 배합된 점퍼를 입은 신임 부회장이 뒤풀이 장소에서 직접 시상했다.
기가 보내온 취재 원고의 글과 사진은 무난했다. 경기 종목들 중 축구 관련 사진만 원고에 삽입돼 있지 않았는데, 김에게 보낸 메일에 기는 이유를 적었다. 남자 직원들만 뛰고 여자 직원들은 그들을 응원했는데, 남성 인재는 그라운드에 세우고 여성 인재는 벤치에 앉히는 이미지라 대외 홍보 차원에서 보기 안 좋다는 내용이었다. 김은 동의했다. 뒤풀이 장소인 횟집에서도 기는 먹지 않고 일을 한 모양이었다. 부회장 포함 임원급 직원 넷의 체육대회 소감이 사인사색 미니 인터뷰라는 박스 기사 형태로 묶여 있었다. 기업 씨아이와 조응하도록 인터뷰이 네 명을 끼워놓았다고 기는 메일에 설명했다. 이만 하면 첫 취재는 합격점이라고 김은 평가했고, 월요 모니터링 업무로 바쁜 기를 대신해 글과 사진을 클라이언트 메일로 전송했다.
대리님, 체육대회 반응이 안 좋은데요?
우성그룹 관련 기사 및 댓글 반응, 온라인 여론 동향을 파악하던 기가 말했다.
뭐 터졌어?
기는 대답 대신 김의 자리로 와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우성그룹을 입력했다. 체육대회 관련 기사 열댓 개가 검색되었다. 뽑힌 제목은 유사하고 쓰인 사진들은 동일했다. 게재 일시도 체육대회 당일인 시월 이십팔일 십칠시경으로 엇비슷했다. 우성 측 보도 자료가 기사화된 것들이었다. 기가 그중 하나를 띄우고 본문 하단의 네티즌 의견란으로 마우스 스크롤을 내렸다.
첫 촛불집회 전날 운동회나 열고, 참 세월好다.
베스트 댓글이라는 이 한 줄이 나머지 수십 의견들을 대표하는 형국이었다.
일단 기다리자.
모니터링 보고 자체를 미루는 건가요.
어. 그냥 가만히 있어.
기는 고개만 끄덕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곧 피씨 메신저로 클라이언트 쪽 담당자가 대화를 걸었다. 대여섯 줄짜리 기다란 링크 밑에 해당 주소의 썸네일이 떠 있었다. ‘불합격으로 정정합니다···취준생 매년 울리는 대기업들’이란 제목의 기사였다. 세 번째 단락 읽어보세요. 빨리요. 메시지대로 김은 속독했다.
우성그룹 역시 지난해 상반기에 이어 올 하반기에도 ‘날벼락’ 문자를 날렸다. 지난 27일 신입사원 공개채용 인적성검사 결과를 발표하며 빚은 해프닝이다. 지원자 800여 명 중 300명만 대상인 합격통보 문자를 전원에게 오발송한 것. 뒤늦게 사실 파악을 한 우성그룹 측은 일요일이었던 30일 오후, 탈락자 500명에게 “불합격으로 정정한다”는 사과 문자를 보냈다. 거듭된 인사 시스템 착오에 지원자들은 공분을 터뜨렸다. 불합격자 A씨는 “인적성검사 발표 이튿날 우성그룹 임직원들이 속 편히 체육대회 중이었다는 소식에 어이가 없었다”며 “임직원 단결 못지않게 ‘예비 우성인’에 대한 처우와 인사 시스템 개선도 심각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비꼬아 지적했다.
다 봤습니다.
답문을 보내자 곧장 전화가 왔다.
방금 뜬 기사예요. 어제 오후에 사건 터지고 기자님이 바로 탈락자 한 분이랑 접촉했나봐요. 아무튼, 그래서요 팀장님. 금요일 체육대회 후기는 블로그 게시 취소예요. 올 연말까지는 사회공헌 홍보랑 이벤트 진행에 집중해주세요. 채용 시즌 끝날 때까지만요. 당분간은 회사 긍정 이슈 중심으로 기획을 돌려야 할 것 같아요. 관련해서 구체적인 요청 사항은 추후에 드릴게요.
김이 통화 내용을 공유해주자 기는 입을 샐쭉거렸다.
체육대회 후기는 아예 안 올리나요? 아니면 시일 좀 지나서 늦게라도 발행하나요?
없던 걸로 쳐. 신경쓰지 마. 이런 일 많아.
네, 대리님.
기는 담뱃갑을 그러쥐고 사무실을 나갔다.
이 시인 말야,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긴 지 이 년 만에 급작스럽게 편집부로 보직 변경이 됐어.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거든. 방송 비판 기사 하나를 썼는데, 필치가 꽤 매서웠나 봐. 그래서 데스크가 수정을 했던 모양이야. 근데 이 시인이 밤중에 몰래 조판실에 들어갔어. 데스킹 끝난 원고를 초고로 되돌려놓은 거지. 다음날 신문 발행되자마자 해당 방송사 쪽에서 항의를 했대. 신문사 입장은 곤란해졌고. 그때가 여름이었어.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이듬해 팔십구년 봄에 혼자, 극장 안에서 그렇게······.
씨엠씨그룹 담당자한테 심하게 욕먹었다고 김이 씩씩댄 날, 선배는 카페에서 그 시인의 기자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얘기의 요점이 뭐냐고 물었을 때, 선배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대답했다. 그게 요점이라고.
위로랍시고 하는 말이 하도 태평해, 김은 무시 당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찡얼거렸다. 블로그 방문자 수가 예전 업체 때보다도 안 나오잖아요, 황 팀장님네 회사 장점이 체계화된 검색 최적화와 독자 대중과 교감하는 고퀄리티 콘텐츠 생산이라면서요, 피티 때 그러셨잖아요, 전문가답지 않게들 왜 그러실까, 한 달 안에 현재 수치보다 일평균 방문자 세 배 증가, 이거 꼭 수행해주셔야 저희도 면이 섭니다, 서로 윈윈해야 연장 계약도 하실 거 아녜요.
김은 클라이언트의 질책을 어투까지 모사해가며 인용했다. 내처 대행사 일도 한번 불평해봤다. 남 대신 일해주는 것이 싫고, 내가 대신 일해주는 그 클라이언트도 결국은 씨엠씨그룹 회장 대신 일하는 직원일 뿐인데, 남 대신 일해준 것을 남 대신 일해주는 사람들끼리 품평하는 짓이 우습다고, 김은 투덜댔다. 시인들은 남 대신 쓰지 않고 자기 글을 쓰니 좋겠다는 소리도 지껄였다.
김이 헐뜯기를 끝냈을 때, 선배는 김 나는 머그잔을 그 시집 위에 올려놓았다. 시집이란 게 시 읽는 용도만 있는 건 아니거든. 생활에도 쓸모가 있거든. 그러면서 잔을 내려놓고는, 데워진 표지에 김의 손을 잡아 올려놓았다.
영화관에서 선배는 시인의 캐리커처가 스크린 쪽을 향하도록, 그 시집을 자기 배 위에 세워놓았었다. 영화 보면서 시집 좀 계속 잡고 있어. 오늘이 삼월 칠일이잖아. 이 시인 기일이야. 여기서 추모하자. 김은 영화 중반쯤 슬쩍 손을 거뒀고, 선배는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까지 시집을 놓지 않았다.
기는 뚜껑 닫힌 스테인리스 밥그릇을 양손에 쥐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서 김은 사원 시절을 떠올렸다. 선배의 말들이 아니라, 선배가 말하도록 만들었던 자신의 직장 생활 고초를 떠올린 것이라고, 자신의 사연이 검색어고 선배의 얘기와 뜨뜻했던 그 시집 표지와 영화관은 연관 검색어들일 뿐이라고, 김은 속으로 우겼다.
뼈해장국집 오는 길에 기는 계속 볼멘소리를 했다. 취재도 사진 촬영도 원고 작성도 진짜 열심히 했다고, 지난주 첫 집회도 못 가고 주말 꼬빡 원고에만 매달렸다고, 내내 뚜덜거렸다. 그런 수고를 들일 만한 원고는 아니었다고, 요령이 생기면 빨리 쳐내게 될 거라고, 대행의 연관 검색어가 허탈이라고 맞받으려다 김은 말았다.
밥그릇 뚜껑을 자꾸 여닫는 기가 민민답답해, 김은 달래는 말을 해봤다. 원고 너무 마음쓰지 마. 허다해 오늘 같은 일. 저녁은 그냥 내 카드로 먹자. 비싼 거. 뼈전골 좋아? 기는 밥뚜껑을 수저 옆에 내려놓으며 좋다고 답했다.
고등학생 여자애가 버너 위에 냄비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네요. 예전에 같이 오시던 과장님은 먼저 가신 거? 김은 끄덕였다. 뚜겅 열지 마시고요, 이대로 잠깐만 두세요. 점화 손잡이를 조절하는 학생의 오른손에 노란색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김은 버너 옆 빈 접시에 놓인 국자 손잡이를 기 쪽에서 자기 쪽으로 돌려놓으며 물었다.
체육대회 날 점심은 잘 줬고?
네, 도시락 챙겨주던데요.
뒤풀이 때 회 한 조각이라도 먹었어?
아뇨, 인터뷰 따느라 정신없었어요.
사보 업체 사람들도 왔고?
네, 기자 분하고 포토그래퍼 분요. 대리님, 사보에는 글이랑 사진 실리겠죠? 사내 소식지니까 여론 반응은 상관없을 거 아녜요. 좋겠어요 사보 팀은.
김은 못 들은 체했다. 기의 미련이 성가셨고, 비위 맞추기에도 이제 언진했다. 학생이 냄비 뚜껑을 가져갔다. 김은 국자를 집어 깻잎과 팽이버섯 위에 국물을 끼얹었다. 끓는 냄비를 내려다보며 기가 물었다.
알바생이랑은 잘 아시나 봐요?
이 집 딸. 종종 와서 일 돕고 그런다.
약한 불로 줄이며 김이 답했다. 기는 얼마간 입을 다물었다. 사수의 냉안을 의식해 저러고 풀죽은 듯해서 김은 조금 미안했다.
시 좋아해?
밥에다 전골 국물을 비비며 김이 말을 붙였다.
시 잘 몰라요. 그냥 가끔 읽어요.
디지털미디어학과에도 문학 수업 있지 않나?
그렇기는 한데, 제 전공이랑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집이 있거든요. 면접 때 말씀드린 거요.
그러냐고, 김은 주억이며 간단히 반주 한 잔 어떠냐고 물었다.
쇼케이스 냉장고에서 새 소주병을 집어 오며 기는 약간 휘청였다. 한 병에서 끊을 걸 그랬다고, 김은 기가 따르는 술을 받으며 후회했다.
오늘 대리님 검은색 코트 입으셨잖아요. 생각나는 시가 있어요. 몇 구절을 제가 외우거든요?
다음 말 대신 자작자음이 이어졌고, 김은 저지하며 냄비 옆 물병을 턱짓해 가리켰다. 기는 못 알아먹었는지 물 대신 술을 또 자작해 마셨다.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좀 와 닿아요. 또 이런 게 있는데요.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이것도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왠지 좀 꽂혀요.
자, 암실에 들어갔다고 상상해보세요. 갑자기 불이 팍 켜졌어요. 밝아지고 나니까 누울 공간도 없는 독방이에요. 답답하겠죠. 차라리 어둠이 더 견딜 만하겠죠. 벽들이 안 보이면 막혀 있다는 인식도 못할 테니까, 사방이 어둠으로 뚫린 셈이니까, 어둡게 투명하다고 느끼지 않겠어요?
이 년 전에요, 그날 바다요, 다들 봤잖아요. 지금도 보잖아요. 우리는 그 배에 타지도 않았는데, 선체 구조나 객실 간 이동 경로 같은 정보들을 인포그래픽으로 속속들이 알아가잖아요.
얼마나 투명해요. 가라앉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투명해지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이렇게나 투명한데, 아직도 바닷속에 있잖아요. 배도 사람도요.
얼마나 어두워요. 얼마나 어둡게 투명해요. 이 투명한 어둠에 갑자기 밝은 빛이 팍! 그러면 대기 속에 나 있는 푸른 유리병 같은 공기들, 둥글고 빈 통로들이 무수히 보일 거잖아요. 그러면 그 통로들을 통해서 그 배도 사람들도 다 데리고 나올 수 있을 거잖아요.
그런데 누군가한텐 그 통로들이 감당 못할 구멍들이어서 계속 이대로 막아두는 거잖아요. 어둡게 투명한 상태로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요. 암순응에 안심하면서요. 태연히 자기 갈 길 걸어가고요.
기가 테이블 위 소주병을 움켜쥔 채 상체를 수그렸다. 목까지 구붓이 빼고 병 표면에 얼굴을 들여댄 모습이, 술 속에 작고 중요한 거라도 빠뜨린 표정이었다. 혹시나 해서 김도 병 안을 살폈다. 침전물 없이 맑은 술이었다. 주량 적은 기가 김은 염려스러웠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이라고 하잖아요 이 시가. 병 안에 그 배랑 사람들을 담아주고 싶다는 상상도 해요. 그러면 다들 숨쉴 수 있을 거잖아요. 태연히 주말에 원고나 쓰고 있었던 게 너무 좀··· 그래요. 어차피 발행도 안 될 거였으면, 광화문 나가도 될 거였는데.
기의 시선은 푸른 소주병에 붙들려 있었다. 술 약한 부사수가 아쉬워서, 다시 회사로 가 잔무를 뒷마감해야 해서, 비틀대는 기뿐 아니라 시 얘기까지 책임져야 할 것 같아서, 김은 술 마시려던 입을 다물었다.
편의점 앞에서 캔 사이다 하나씩을 사 마신 뒤에야 기의 걸음은 똑발라졌다. 회사에 당도해 김은 기를 먼저 들여보내며 담배를 물었다. 사옥 입구 시건장치에 사원증을 대며 기는 말했다. 첫 월급 타면 제가 밥 사드릴게요. 들어갈 때 기는 문을 열어두었다.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술을 마시면 시집 없이도 시가 외워지고, 기 앞에서 별안간 시어들이 불러들여지는 요즘이, 김에게는 새롭게 생성된 검색 알고리즘처럼 여겨졌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들이 잡상스럽게 들붙는 치어떼라면, 시어들은 머릿속 깊은 데서부터 유영해 올라오는 저어들 같았다. 그래서 이사이에 김은, 대학 시절과 이 년 전에 비해 시어들의 다가옴을 덜 부담스러워 했다.
이십칠 쪽부터 삼십 쪽까지 이어진 「어느 푸른 저녁」이 오늘의 시였다. 기는 검은 코트를 보고 이 시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검은 코트가 바로 오늘의 시를 검색 결과값으로 불러들인 오늘의 키워드인 셈이라고, 김은 해석했다. 이 시의 “검은 외투”와 자신의 검은 코트가 겹쳐지리라는 상상을 김은 해본 적이 없었다. 또 이 시가 불러들이게 될 것이 그 배가 될 줄도 예감한 적 없었다.
김은 시구를 빌미로 이 년 전 기억을 개고해보았다. 문장마다 「어느 푸른 저녁」을 욱여넣었다. 선배가 사옥 앞에 찾아온 그 밤, 격무 스트레스가 “홀연히 정지하고”,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거리 위에서,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냐며 의연히 퇴근해버리고, 진도실내체육관까지 개통된 “둥글고 빈 통로” 앞까지 선배와 나란히 걸어간다, 그리고 “태연히” 선배를 안아준다, ······.
담배를 끄고 기가 열어둔 문안으로 들어갈 때, 김은 왠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연재 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8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