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예잡지 『시인 보호 구역』 통권 18호(2018) 수록 작품
아이가 서 있다.
그럴 리가. 새벽 세 시다. 헛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나폴레옹과 한라산을 번갈아 마셔댔으니. 김 계장네 부부도 집회 나가? 우리 딸이 고삼인데 플래카드 만들고 난리다. 김 계장은 수능 안 보고 바로 취직했지? 우리 딸은 김 계장만큼 성실하지도 않아, 어떡하냐 진짜, 라는 지점장 말을 듣고 앉아 있었으니.
들으면서 성실히 폭탄을 말아준 덕에 지점장을 겨우 재웠다. 따님 보러 가셔야죠, 하며 지점장을 택시에 밀어넣을 때가 두 시쯤. 그 이후로는 기억이 흐리다. 다만 ‘아가씨’ 소리 들은 것만은 또렷하다. 아가씨, 일어나요, 이만사천 원. 깨보니 ○○아파트 10단지 1003동 건물 앞이었다. 누구한테 밀려 넣어졌던 걸까.
아이는 계속 서 있다.
초등학교 일이 학년 정도. 남자애다. 유명 브랜드 로고가 가슴팍에 찍힌 롱패딩에 코르덴 바지. 부모가 꽤나 신경 써준 듯한 옷차림. 표정도 제법 의젓하다.
귀신인가.
저리 단정한 꼬맹이가 새벽 세 시에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저러고 서 있을 리가.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다행이다. 10단지 1003동 앞에서 귀신 봤다는 소문이 퍼지진 않겠군. 남편이랑 찾다 찾다 찾아낸 매물이다. 값 떨어지면 큰일난다. 저 귀신, 나도 못 본 걸로 하자. 뛰자.
“아줌마.”
한쪽 힐이 꺾인다. 몸이 휘청, 무너질 뻔한다. 아이가 이 하나 빈 위아래 치열을 들들거리고 있다. 치열 틈으로 찬 공기가 들락날락하는지 자꾸 쉭쉭거린다. 숨 소리? 사람인가?
“너⋯ 왜 이⋯이⋯러고 있니?”
“저 얼음이에요.”
역시, 귀신인가⋯. 뒷걸음질치다 또 한 번 휘청인다. 잽싸게 양발의 구두를 벗어 토트백 안에 쑤셔 넣는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자 한기가 타이즈를 타고 올라온다. 내 이도 달달 떨리기 시작한다.
“얼음땡 했는데 애들이 저만 땡을 안 쳐줬어요.”
“그⋯게⋯ 한⋯이 됐구나⋯. 아줌마가 땡⋯ 쳐주길 원⋯하니⋯?”
“아줌마는 우리랑 얼음땡 안 했잖아요. 딴 사람은 땡 못 쳐요. 규칙이에요.”
“그러⋯니⋯? 그럼 너⋯너⋯넌 계⋯속 어⋯얼⋯음이니⋯?”
“몰라요. 추워요.”
몇 시간 후면 출근해야 하고, 회식 때 차장이 부탁한 금융상품 설명회 PPT 자료를 만들어야 하고, 퇴근 후 몇 시간 동안은 시부모님이랑 절인배추 사러 시장 돌아다녀야 하고, 며칠 후 주말엔 김장 오십 포기를 해야 한다. 인간들과의 앞날 속엔 ‘나’란 사람, ‘나’란 여자가 희미하지만, 귀신과의 지금 여기에서 ‘나’는 선명하다. 술이 안 깬 와중에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오싹 깨닫는다. 게다가 귀신이긴 해도 애는 애다. 말투에 귀염성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 이들도 딱딱거림을 멎는다.
“너만 땡을 안 쳐줬어? 나쁘네 친구들.”
“늘 이래요. 지들끼리 돌아가면서 술래 해먹고, 저만 땡 안 쳐주고 집에 가요.”
“그런 애들이랑 왜 어울리니?”
“걔네 말곤 놀 애들이 없어요.”
“그런 못된 애들이 만든 규칙은 어겨도 돼. 너가 너를 그냥 땡 쳐. 그럼 얼음 풀릴 거 아냐.”
“아줌마도 그래요?”
“아줌마는 어른이라 얼음땡 놀이는 안 하잖니.”
“그럼 모르시겠네. 얼음인데 누가 땡 안 쳐줘서 계속 얼음 못 푸는 심정.”
어디 어른한테 반말⋯, 이라고 혼내려다 참는다. 귀신일지도 모르잖아. 음, 얼음인데 누가 땡 안 쳐줘서 얼음 못 푸는 심정? 출근 첫날 지점장은 ‘얼어 있지 말고 웃어요’ 하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입사 동기들 중 유일하게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자 대리 하나가 ‘김 계장만 풀렸네?’ 하며 웃었다. 두 번째 유산 후 어느 밤, 노트북 펴놓고 잠든 남편을 깨우려다 나는 얼었다. 화면엔 ‘당신의 난소도 늙는다’라는 제목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글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냉동난자 얘기였고, 출처는 ‘난임부부 카페’라는 데였다. 그날 얼어붙은 게 여지껏 풀리지 않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해주려다 참는다. 귀신이어도 아직 애잖아.
“아줌마도 주말에 촛불 들어요?”
“아줌마는 김장해야 돼.”
“우리 아빠는 광화문 한 번도 못 갔어요. 일주일 내내 회사 다녀요.”
“아이구.”(‘우리 아빠⋯? 혹시, 너네 아빠랑 동시에 죽은 거니?’라고 물으려다 참는다.)
“아줌마처럼 새벽에 자주 들어와요.”
“그게 다 너 위해서 그러시는 거야.”
“몰라요. 땡도 못 쳐주는 게 무슨 아빠라고.”
“얘, 너 아빠한테 그런 말 하면 못 써.”
“근데 우리 아빠도 얼음이에요.”
“그건 또 무슨 얘기니?”
“자기는 늘 쫓기고 산대요. 그러다 이렇게 멈춰버렸대요. 인생이.”
“그런 말도 다 하셨니?(‘정말⋯ 너네 아빠랑 같이 죽은 거니?’라고 묻고 싶은 걸 꾹 참는다.)
“쫓기다 멈추면 얼음이죠. 저도 술래 도망 다니다가 얼음 됐는데. 제가 어른 되면 아빠를 땡 쳐줄 거예요.”
이상하다. 내가 아이를 안고 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아이가 만져진다.(귀신이 아닌가?) 아이 볼은 땡땡하고 차갑다. 나는 두 손바닥을 빠르게 문지른 뒤 아이의 양 볼에 대준다.
“아줌마가 너 땡 쳐줄게. 친구들이 어떻게 풀려났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 너희 눈엔 안 보였겠지만 아줌마 한 분이 계속 얼음땡 같이 했었다고. 그분이 땡 쳐줬다고.”
“투명인간처럼요?”
“투명어른이라고 그래. 알았지?”
“아줌마 머리 진짜 좋다.”
“어른이잖니. 그리고 앞으론 늘 투명아줌마를 생각해. 알았지? 그럼 오늘처럼 얼음 못 풀려날 일은 없잖아.”
“맞아요. 너무 추워요.”
“그래, 자, 땡!”
“고마워요 아줌마.”
“아줌마가 아빠 대신 사과할게. 얼음땡 같이 못해줘서 미안해. 땡 못 쳐줘서 정말 미안해. 많이 추웠겠다.”
“괜찮아요. 바닷속은 더 춥대요 아줌마.”
또 이상하다. 내가 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나는 아이의 등을 몇 번이고 쓰다듬고 두드린다. 속에 얼어 있던 것들이 녹아 흐르는 건지, 과음 탓에 속이 메스꺼운 건지 모르겠지만, 뜨거운 것들이 계속 입에서 토해져 나온다. 땡, 땡, 땡, 땡, ⋯.
독립 문예 잡지 『시인 보호 구역』(@sibozone2012)의 2018년 ‘손바닥 소설’ 공모 당선작. 『시인 보호 구역』 통권 18호(2018. 10. 15.) 수록. 200자 원고지 15매 분량 엽편소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이 있다. 지금은 소설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