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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Dec 31. 2023

엽편소설 「나의 쌀떡고딕」

2023 ‘군산초단편문학상’ 응모작(낙선작)

나는 서체 디자이너다. 작은 폰트 기업에서 십 년 조금 넘게 일했다. 올봄 회사가 사실상 폐업 수순을 밟기로 결정하면서 실직했다. 대표는 여느 때처럼 두루뭉술한 어휘로 임직원들에게 희망 퇴직을 일괄 통보했다. 경영난의 심각성도 원인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고 명확한 퇴사일도 언급을 안 했다. 기민한 동료들은 미리 이직처를 잡아 잘도 옮겨 갔다. 몇몇은 개인사업자를 내고 독립 준비를 했다. 근무 시간 중 자기 이름을 내건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의 로고타이프와 심벌을 그리고 웹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직 생각도 독립 계획도 없던, 그러니까 창립 삼십 년을 자랑하는 ‘우리 회사’의 저력을 끝끝내 과신했던 나와 두 디자이너만 평소처럼 일을 했다. 대형 마트의 피비 상품 브랜드를 위한 전용 글꼴을 가까스로 납품했고, 칠십 만 구독자를 거느린 인기 유튜버 겸 캘리그래퍼의 펜글씨를 원도(原圖)로 한 핸드라이팅 폰트를 완성했다. 다 끝내고 나니 넷만 남았다. 나를 포함한 디자이너 셋과 경리직 부장님 한 분.

우리는 유월 마지막 금요일을 기하여 퇴사 처리되었다. 일주일 뒤 나는 고용노동부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직제 개편에 따른 조직의 폐지·축소 조치로 인해 사업주의 퇴직 권고를 받았음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한 번 더 문자 메시지가 왔고, 나는 거기 적힌 대로 실업급여 수급자격 인정 신청서를 온라인으로 작성한 뒤 내 거주지인 서울 군자동 근처 성동광진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방문하여 실업급여 수급을 위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 나머지 직원들도 똑같이 했으리라. 우리는 실직 후 한 번도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고용복지센터를 나오니 오후 다섯 시 언저리였다. 나는 근처 중식당에 들어가 마파두부밥을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던 중 휴대전화 주소록에 레지세르(Reżyser)라 저장된 친한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미안했지만 받지 않았다. 형과 얘기하면 기본 삼십 분이 넘어가는 터라 밥 나오기 전에 전화를 받으면 식사도 통화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았다.

로만 폴란스키가 다녔다는 폴란드 우츠 국립영화학교의 수석 졸업생 출신인 형과는 오 년쯤 전에 친해졌다. 형은 영화 연출보다는 한국의 독립 영화를 폴란드 영화계에 소개하는 일에서 더 보람을 느낀다고 여러 번 말했었다. 졸업 작품으로 제법 큰 상을 수상한 형은 이후 내놓은 단편 세 편으로 수상 이력을 추가하며 국내 시네필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졌다. 그렇게 자기 이름을 알린 후 영화 저널리스트와 영화 모더레이터로 전직했다. 폴란드 주재원 근무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형은 귀국해 폴란드와 한국 영화계를 잇는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자처했다.

형이 우츠에 다닐 때, 내 대학 동기 중 유일하게 졸업한 지 이십 년이 다 되도록 꾸준히 연락하고 술 마시는 녀석이 크라쿠프로 혼자 배낭 여행을 갔었다. 그때 한 술집에서 둘이 우연히 만난 뒤로 형과 내 동기는 절친이 되었다. 나는 동기의 소개로 형을 알게 되었다. ‘미대 출신 시인’이라는 수식어로 몇몇 언론 매체에 소개되기도 한 동기 녀석, 폴란드에서 영화를 공부한 레지세르 형, 글자를 짓고 그리는 서체 디자이너인 나. 이렇게 셋이 자주 만나 술을 마셨다. 재작년까지는 그랬다. 지난해 가을께 형은 경기도 양주시가 운영하는 문화원의 제의로 그곳 레지던시에 머물며 중고등학생들에게 영화 연출 기초 수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시 쓰는 내 미대 동기는 제주 출신 여자와 결혼해 서귀포에 신혼집을 구했다. 

두 술친구가 서울을 뜬 뒤로 나는 집 주변 편의점에서 ‘혼술’을 했다. 그리고 실직을 했다. 회사 잘린 얘기는 아직 두 사람에게 하지 않았다. 자격지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꽁한 기질이라도 지닌 성정이었다면 아마 한 회사만 십 년간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삼 년 단위로 이 회사 저 회사 점프하며 착실히 연봉을 올렸을 테니. 대학 동기들보다, 친구들보다, 현재 직장 동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윗급인 처우와 직위를 선점하려고 말이다. 커리어 운용을 잘한 이들은 대개 그런 성향의 소유자들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직장 생활 경험상 그렇다는 얘기다.

언젠가 형은 당시 구상 중인 시나리오 얘기를 했다. 주인공은 삼십 대 후반의 남성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미혼이고 혼자 열아홉 평짜리 빌라에 사는 남자는 오로지 자신과 관계된 사물만을 그렸다. 식사 때 쓰는 수저와 포크, 특정 브랜드의 담뱃갑, 수십 종의 안경집(수집벽이 있는 캐릭터였다), ⋯⋯.

“자기 안에 무한의 수장고가 있다고 믿는 남자야. 현실의 물성이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작화되면 마음속 공간이 채워진다고 상상하는 거지. 그 수장고에는 자기 자신만 출입할 수 있어. 관계자 외 출입금지. 이런 사인보드가 커다랗게 붙은 내면이랄까. 남자는 자신의 세계를 관찰하느라 늘 신경이 곤두서 있어. 그래서 남의 성공을 시기하거나 남의 물건을 탐할 시간이 없는 거고.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의 극단적 유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인물을 그려보고 싶어. 너를 많이 참고하려고.”

나는 좀 억울해서 정색을 하고 반문했다. 영화감독의 관점에서 나라는 인물을 정말로 그렇게 바라보는 거냐고. 다행히 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리려고 하는 인물은 극단의 유형이야. 너는 자족형 인간의 이상적 모델이지. 자족한다는 건 뭐든 다 받아들인다는 거거든. 못 받아들이면 만족을 못 하니까. 내 폰 주소록에 네 번호를 ‘예스테시 아시밀라츠이느(Jesteś asymilacyjny)’라고 저장했어. 유 아 어시밀레이티브(You are assimilative), 동화력이 있다, 그런 의미야. 예전에 이 새끼—시 쓰는 내 동기를 가리킨다—가 주식으로 오천만 원 넘게 수익 본 적 있었잖아. 우리 삼 차까지 마시고 노래방 갔던 날. 나는 부러워서 미쳐버릴 지경이었거든. 이 새끼가 만약 계산 각출하자고 했으면 난 바로 집에 갔을지도 몰라. 근데 너는 너무 평온해 보였어. 축하한다고 말하는 게 진짜 같았어. 나중에 너하고 나만 둘이 술 마실 때도, 내가 그렇게 이 새끼 하루 종일 시나 쓰고 한량처럼 사는데도 돈복은 타고났다고 뒷담화 깔 때도 너는 얘 편만 들더라. 얼마나 다행이냐고, 한 이 년쯤은 글에만 집중해도 되겠다고. 그때 느꼈어. 넌 그냥, 남이 무슨 얘기를 하든 어떤 자랑을 늘어놓든 전부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애라고. 얘가 불로소득을 벌어서 기분 좋은 만큼은 아니겠지만, 거의 그 정도에 가깝게 네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라고. 단순히 애가 착해서 그렇다, 라고 정리하는 건 표피적이야. 넌 아시밀라츠이느 유형의 인간이야.”

취한 형의 말을 생생히 기억하는 까닭은 물론 내가 그날 형보다는 덜 마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내 인물평을 꽤나 장황히 듣는 경험은 흔하지 않다. 머릿속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중식당 뒷문으로 나가니 흡연 공간이 있었다. 간이 셌던 마파두부 양념의 잔맛 덕에 식후 흡연 만족도는 최상이었다. 나는 기분 좋게 레지세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스테시 아시밀라츠이느! 많이 바쁜가 봐?”

“아냐, 널널해. 화장실에 폰을 안 가져가서 이제 연락하네.”

“아, 니에 마 스프라비(Nie ma sprawy). 딴 게 아니고, 너 혹시 여기서 강의 한번 해볼래? 문화원에서 특성화고 학생들 대상으로 취업 강좌 프로그램을 만들었거든. 실용음악가, 웹툰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이렇게 섭외를 했다는데, 내가 지인 중에 서체 디자이너 있다고 하니까 기획자가 엄청 좋아하더라고. 세 시간 정도 서체 디자인이 뭔지, 서체 디자이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하면 돼. 대표작 몇 개 선별해서 작업 과정이랑 뒷이야기 좀 풀어주고, 질의응답 받고, 그냥 이렇게 진행하면 돼. 강의료는 세후 삼십만 원. 어때? 겸사겸사 와서 술이나 마시자. 이틀쯤 연차 내고 편히 쉬다 가. 숙박은 내가 알아서 다 준비해줄게. 레지던시에서 같이 자면 좋은데 규정이 하도 엄해서 그건 좀 힘들 것 같고, 대신 다른 괜찮은 데 미리 예약을 해놓으려고. 요새 비수기라 싸. 부담 갖지 말고.”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임의계속가입자 신청에 실업급여 신청까지 모두 완료한 터라 당분간은 신경 쓸 일이 없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십 년 근속의 대가로 받은 퇴직금 액수가 상당했다. 여행 경비, 즉 식대와 숙박비와 왕복 주유비를 전부 지출해 봐야 현재 통장 잔고에서는 크게 티도 안 날 듯했다. 다만 걱정은 실직 기간 중 수익이 발생할 경우 실업급여 수급 인정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고작 삼십만 원이고, 명목상 공공 기관 초빙 강사로서 공공 예산 일부를 대금으로 받는 셈이니 나는 공무에 일조하는 것이다. 게다가 청소년을 위한 취업 특강이므로 고용 창출 기여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행사 후 고용복지센터 담당 공무원에게 어떻게든 해명할 자신이 있었다. 여름 휴가 일정을 확정한 직원들이 그랬듯, 양주행을 앞둔 나도 공중대고 초긍정 상태에 취해버렸던 것 같다.

강의 일시는 삼주 뒤인 팔월 첫 주 금요일 늦은 오후였다. 나는 목·금·토 이박 삼일로 다녀올 계획을 세웠다. 첫날 저녁에 형과 만나고, 이튿날 강의 후 또 형과 마시고, 마지막날은 혼자 이곳저곳 드라이브를 하다 심야에 서울 집으로 복귀하는 노정을 구상했다.



나는 양주에 가지 않았다. 대신 양구에 갔다. 차량 내비게이션에 설정한 목적지는 경기도 양주의 양주문화원이 아닌 강원도 양구의 양구문화원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도착 후 다섯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지금 옴. 여기 조용하니 좋네. 혼자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까 퇴근하면 연락 줘. 픽업하러 갈게.’ 문화원 앞 도로 건너편 동네마트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형한테 문자를 보내고, 근방의 막국수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계산할 때 받은 지역 할인 쿠폰을 써 보고 싶어 여기저기 운전해 다니며 적당한 용처를 물색하는 내내 엉뚱한 행선지에서 혼자 뻘짓 중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출발할 때 ‘주’를 ‘구’로 입력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가능했던 근본 원인은 이른바 집돌이로 불리는 나의 성향 아니었나 짐작한다. 대학 시절과 직장 생활을 통틀어 내 인생의 여행지는 국내외를 합쳐 대여섯 곳 정도다. 외출과 외유를 딱히 즐기지 않는 유형이라 해야 할까. 여름 휴가철에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바캉스나 호캉스보다는 홈캉스 쪽이 체질에 맞았다. 이렇다 보니 전국 팔도의 지명을 잘 몰랐다. 전라도 광주 말고도 경기도에 동명의 도시가 있는 줄을 몇 년 전에야 알았을 정도다. 애초에 양구라는 장소를 알았다면 양주와 헷갈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심각한 길치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내비게이션의 방향 지시에 그저 순종할 뿐이다. 자신의 방향 감각을 적극 동원해 사통팔달의 노선 흐름을 입체적으로 지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나는 강원도 양구로 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갔고, 어디에 왔는지도 모르는 채 스스로 잘 도착했다고 확신했다. 지난해 승진 기념으로 중고차 매매 단지에서 소형 에스유브이를 장만한 이후 첫 장거리 주행이어서, 양구에서 나는 줄곧 설렜다.

지역 할인 쿠폰을 쓰기로 정한 곳은 어느 군용품점이었다. 푸른 바탕의 원 안에 하얀 산 세 개가 나란한 크고 작은 문장(紋章)이 상점 창문에 여럿 붙어 있었다. 민방위 마크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군부대 엠블럼이었다. 문 앞 입간판에 ‘21사단 백두산부대 장병 및 가족 할인 우대’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에 차를 세운 이유는 가게 통유리창 너머로 보인 검은색 방상내피, 즉 깔깔이 때문이었다. 내 군 생활 때만 해도 깔깔이는 누름한 빛깔 한 종뿐이었다. 검정 깔깔이는 처음 보았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사려고 했다. 양구 군용품점에 진열된 검은색 방상내피는 서체 디자이너인 내 눈에 잘 만든 폰트 한 벌처럼 보였다. 기업들이 로고타이프 리뉴얼과 전용 글꼴 개발로 이미지를 쇄신하듯, 대한민국 국군도 군복 리디자인을 통해 리브랜딩 후광을 입게 되리라. 전투복 맵시가 다 저 검정 깔깔이 같다면 아무도 휴가 나온 현역병을 군바리라 낮잡아 부를 수 없으리라. 나는 이런 감탄을 하면서 사이즈별 피팅까지 마친 후 엑스라지 검정 깔깔이를 구입했다.

형에게 인증샷을 보내려고 휴대전화 카메라로 손에 든 깔깔이와 군용품 가게 전경을 촬영했다. 그제서야 상점 이름이 ‘투애니원군인백화점’인 것을 알았고, 상호에 쓰인 한글 서체가 삼 년 전 내가 디자인한 ‘쌀떡고딕’임을 간파했다. 가래떡 형상을 모티프로 한 돋움 계열 서체였고, 국내 쌀떡볶이 프랜차이즈 브랜드의 전용 글꼴로 납품한 작업물이었다. 시그니처 스타일로 삼은 요소는 이응과 미음이었다. 나는 두 자음의 속 공간을 뚫지 않고 텍스처 기법을 적용했다. 이응은 국물 떡볶이에 들어가는 순대를, 미음은 그 브랜드의 부속 상품이었던 유기농 쌀 식빵을 각각 형상화한 것이었다.

투애니원군인백화점 간판의 ‘애’, ‘원’, ‘인’, ‘점’ 네 글자는 자체(字體)의 정체성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쌀떡고딕은 무료 배포된 사실이 없었다. 즉 이 점포는 쌀떡고딕을 무단 사용한 셈이었다. 서울 황학동에 본점을 둔 떡볶이집 전용 글꼴이 강원도 양구의 군용품 상점 간판에 쓰인 것이 나는 좀 답답했다. 저작권법 위반이니 불법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만든 이가 의도한 적 없는 용처에 게시된 점이 안쓰러웠다. 그러면서도 반가웠다. 초행길인 여행지에서 우연히 내 작업물을 발견했으니.

나는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폰트 파일은 컴퓨터프로그램저작물로 저작권 보호를 받습니다, 귀하의 사업장 간판 글씨는 쌀떡고딕 폰트 파일을 위법하게 쓴 사례입니다, 라고 지적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어차피 저작권자는 내가 근무한 회사였고 나는 거기서 권고 사직을 당했으니 굳이 사냥꾼 노릇을 할 책무는 없었다. 사장님 간판에 쓰인 서체 말이죠, 바로 제가 만든 글자입니다, 저는 서체 디자이너거든요. 다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투애니원군인백화점 문을 또 연 것이었다.

“사이즈 바꾸십니까? 역시 박시하게 투엑스라지로 가야지 말입니다.”

가슴팍에 커다란 개구리가 프린팅 된 얼룩무늬 반소매 티셔츠 차림의 사장님이 대뜸 아는 체를 했다. 나이가 들어 뵈기는 하나 완연한 중년은 아닌, 많아 봐야 나보다 대여섯 살 위쯤으로 보이는 사장님은 깍듯이 다나까체로 말했다. 나름의 모객 활동 차원에서 부러 말투도 헤어스타일도 군대식을 고수하는 듯했다.

“아뇨, 사이즈는 딱 좋고요. 사장님 그, 여기 간판 글자요, 혹시 폰트를 직접 고르신 거예요?”

“옙, 맞습니다. 이 가게에 붙고 걸리는 건 죄다 내가 직접 붙이고 걸고 관리합니다. 왜 그럽니까?”

“실은 제가 서체 디자이너인데요. 간판에 쓰신 폰트가 제 작업 같아서요. 반가워서 한번 여쭙는 거예요. 단속 나온 거 아니고요.”

사장님은 코밑의 보이지 않는 탄피라도 집으려는 듯 인중 양쪽을 엄지와 검지로 느리게 쓸어 모으며 나를 빤히 보았다. 잔 수염과 지문의 마찰음이 작게 들렸다. 사장님 얼굴은 눈은 쪼끄마해도 양안 사이 불뚝한 매부리코와 사각턱 때문에 시각적으로 위압감을 발산했다. 군용품점 주인 역할에 적합한 디자인이다, 라고 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쌀떡고딕 엑스트라 볼드. 상용 한글 이천삼백오십 자 헤드라인 서체, 라이트부터 엑스트라 헤비 볼드까지 패밀리 네 종. 맞습니까.”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서체 디자이너들은 자기가 만든 서체를 자식이라고 여기거든요. 누군가가 잘 알아주면 그만 한 기쁨이 없어요.”

“정말 손님이 만든 글자다,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제가 만든 글자 맞습니다.”

나는 사장님처럼 다나까 투로 대답했다. 내 글자의 이름과 사양을 정확히 알아준 사용자에게 나름 예를 표한 것이었다. 사장님은 상의의 개구리 형체가 쫙 펴질 만큼 등을 곧추세우며 양 허리에 두 손을 짚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교관 같아서 나도 모르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사장님은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얼룩무늬 범퍼 케이스가 씌워진 미니 사이즈 아이폰은 사장님의 손 안에서 곧 귓가로 옮겨 갔다.

“어이, 통신보안. 형님 지금 바빠? 잠깐 우리 가게로 좀 건너와 보셔. 아이, 와 보시면 알아. 빨리요, 알았지?”

아이폰은 하의 호주머니로 원위치되었고 구릿빛 두 팔뚝은 다부지게 마주 끼어졌다. 힘줄이 불거진 두꺼운 팔짱을 움 삼아 개구리는 완벽히 엄폐되었다.

한 오 분쯤 지났을까, 투애니원군인백화점 문이 열리며 아주 작은 중년 아저씨 한 분이 들어왔다. 백칠십 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키에 어디 하나 각진 데가 없어 보이는 동글동글한 체형이었다. 어린 자식이나 반려 동물이 있다면 아빠의 몸 어느 부위를 베고 누워도 편안함을 느낄 듯했다. 그러나 말투는 딱히 푹신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부사관들 체육대회 때문에 김밥 주문 들어와서 바빠 죽겠고만, 이게 형을 오라 가라 하고 말이야.”

“형님, 여, 우리 가게 손님인데, 일단 인사부터 하시고.”

마치 본인 가게에서 혼자 기다리던 손님을 뒤늦게 응대하는 양 아저씨는 “아유,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며 사과 같은 인사말을 건넸다. 상대의 친절한 기세에 눌려 나도 정중히 맞인사를 했다.

“이분이 형님, 예전에 형님네 가게 그, 쌀떡고딕체 만드신 디자이너라네? 손님, 여기 우리 형님은 양구 터미널 앞에, 무적분식집 방덕복 사장님이세요. 거꾸로 하면 복덕방.”

키득거리는 사장님을 가운데 두고 분식집 방덕복 님과 쌀떡고딕체 디자이너의 뜬금없는 상견례가 이루어졌다.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다가 나는 문득, 삼 년 전 서체를 납품한 프랜차이즈 업체의 계약서상 사명이 ‘덕복상회’였고 점포 이름은 ‘복떡빵’이었음을 떠올렸다. 계약 체결은 늘 디렉터급이 하다 보니 실무 디자이너들이 클라이언트의 법인명까지 다 기억하기는 어려웠는데, 자기 일 미루기로 정평이 난 당시 부장님이 계약서 작성을 내게 시켰던 덕으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내가 양구 토박이라 작년 초에 사업 접고 올 초에 고향 내려왔어요. 점포들 다 정리하고 나니까 남은 게 대출 빚이랑 폰트 파일밖에 없더고만요. 쌀떡볶이며 쌀 식빵이며 레시피는 갖고 있는데 다시 제조할 장비나 사람은 다 날아갔습니다. 빚은 뭐, 갚다 보면 죽기 전에는 사라지겠지만 복떡빵 간판 글자들은 내가 삭제하지 않는 이상 컴퓨터 안에 계속 있겠죠. 이 방덕복이가 한때는, 서울에서 지점 열 군데나 낸 복떡빵 사장이었다는 걸 알려주는 글자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무적분식 간판도 쌀떡고딕이고, 여기 백화점 대표 동생이 가게 연다고 할 때도 폰트 파일을 줬어요. 이 방덕복이가 제일 잘나갔던 순간을 딱, 박제를 해놓으면 좋은 기운이 들어올 것 같아서요.”

무적분식집 사장님과 투애니원군인백화점 사장님은 동네에서 형 동생 하는 사이가 아니라 진짜 형제라고 했다. 나는 두 가게로부터 선물을 하나씩 받았다. 양구 특산물인 펀치볼 시래기 한 통과 그걸 넣은 특제 김밥 네 줄, 그리고 검정 깔깔이 미듐 사이즈 한 벌.

방덕복 님과 그의 아우 분(성함을 여쭙지는 못했다)은 사이드 미러에서 점차 작아져 이내 사라질 때까지 내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적분식집 사장님은 작아져도 둥글었고, 투애니원군인백화점 대표님은 작아지니 형처럼 동그랬다.



내비게이션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삼십 분이었다. 나는 양구문화원 근방 동네마트 주차장에 다시 차를 댔다. 상하차 트럭 뒤에서 담배 연기가 올라오기에 그쪽으로 가 한 대를 빼 물었다. 그러고는 휴대전화 카메라로 마트 간판과 맞은편 문화원 건물 사진을 찍어 형에게 전송했다. ‘나 여기서 기다림. 퇴근하면 이리로 와.’

장초가 중간 길이쯤 되었을 때 전화가 왔다. “구우피 예스테시(Głupi jesteś)!” 형의 첫마디였다. 폴란드어라 뜻은 몰랐지만 어조는 박박이 꾸중이었다. ‘이 멍청이!’ 정도로 나는 적당히 알아들었다. 형의 다음 말을 들었을 때 내 해석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그렇다. 경기도 양주가 아니라 강원도 양구에 와 있었음을 형을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양구문화원에서 양주문화원까지는 차로 두 시간 반 거리다, 지금 출발하면 늦어도 여덟 시 반에는 도착할 거다, 밥 안 먹고 기다리겠다, 문화원 앞에서 전화해라, 양주랑 양구를 동화시켜버리다니, 예스테시 아시밀라츠이느! ……전화를 끊자마자 차에 탔다. 시동을 걸기 전 형에게 또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형 윗도리 사이즈 미듐 맞지?’ 투애니원군인백화점을 지나 양구 터미널 무적분식집 앞길 네거리에서 신호 대기 중일 때 답장이 왔다. ‘ㅇㅇ’. 쌀떡고딕이 둥글게 작아지고 있었다.


― 2023년 8월 ‘군산초단편문학상’ 응모작(낙선작) / 200자 원고지 50매 분량

― 사진: 강원도 양구의 한 거리에서 직접 촬영. 사진 속 벽화 원작은 양구 출신 화가 박수근의 그림.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지금은 소설을 쓴다. 2023년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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