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스 오엑스(reversed ○X) 문제
떠듬적떠듬적 혼자 책을 펼치거나 알음알음 디자이너들에게 물어 형태 개념에 관하여 배워 가다 도상학(圖像學)이라는 학문의 존재도 처음 알았다. 한 서체 디자이너가 “세로를 가로로 눕히면 신성 모독인 거 알아요?”라는 기이한 농담을 던지면서 선뜻 빌려 준 책 덕분이었다.
발리냐노 신부는 선교사들에게 포교에 임해서는 승려와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늘 했지만 불교 사원이 모두 옆으로 긴 데에 놀라 “옆으로 긴 것은 악마의 형식”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일본에 세워지는 그리스도교 성당에는 장지와 다다미는 허용할 수 있지만 옆으로 긴 것만은 참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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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일본의 종교 건축에서는 옆으로 긴 것이 주류였을까?
일본 문화는 기본적으로 가로이기 때문이다. 밥상 위의 젓가락은 반드시 가로로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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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이나 한국은 젓가락을 세로로 놓는다. 서양에서도 스푼, 나이프, 포크는 세로로 놓는다. 일본에서 세로가 나올 때는 이상 사태가 일어났을 때다. 예컨대 죽은 자의 머리맡에 놓는 제삿밥에서는 밥에 젓가락을 수직으로 세운다.
그런데 왜 가로라는 것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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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우치다 시게루는 가로 문화, 수평 문화에 ‘앉는다’는 신체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로에 집착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치다의 『인테리어와 일본인』에 따르면 앉음으로써 눈은 좌우로 움직이고 ‘바라본다’라는, 풍경을 수평으로 보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고 한다.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 『눈의 황홀』 개정판, 바다출판사, 2015, 54~56쪽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당최 ‘형태 분석’이 되지를 않아 쩔쩔맸던 그 농담의 맥락이 바로 위 인용문이다. 그리스도교 신부와 일본 생활 양식의 극명한 가로세로 관점 차이를 소개한 일화다. 세로를 신성한 형태로, 가로를 불경한 형태로 믿는 의식 구조는 종교적 맥락으로 지어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좌식 생활에 따른 편의성을 고려해 세로보다 가로를 선호한다. 가로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형태, 세로는 “이상 사태”를 알리는 특수 형태. 각자의 맥락을 근거로 형태를 규정하고 활용하며 때로는 신성시하기도 한다.
가로와 세로는, 가로와 세로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 정도의 인식만 가져도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은 없으리라. ‘형태’의 사전적 정의 1번만 잘 챙기면 될 일이다. 하지만 디자인과 글쓰기를 비롯한 일체의 콘텐츠 설계 행위를 업으로 삼으려는 이들이라면 2번과 3번 렌즈로 새 안경을 맞춰야 한다, 라는 것이 『눈의 황홀』을 정독한 후의 감상이었다.
우주는 광대무변하여 오늘 이곳의 진리 하나로 전 시공간을 열어 젖히기 불가능하다. 종교나 초자연 영역까지는 잘 모르겠고 적어도 지성과 교양의 삼차원 세계에서 모니즘(monizim)은 어불성설이다. 형태가 맥락을, 맥락이 형태를 근거한다고 밝힌 이번 챕터 또한 비판적으로 읽혀야 마땅할 것이다. 오류의 실례가 게임 업계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 소니가 양산하는 콘솔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이하 PS)’은 1994년 첫 출시 후 전 세계 사용자(게임 플레이어)들에게 지금껏 네 가지 기호로 각인되어 오고 있다. 게임패드 버튼에 새겨진 세모(△), 오 또는 동그라미(○), 엑스 혹은 가위표(X), 네모(□)가 바로 그것. ‘△○X□’ 형태는 PS의 각종 광고물에 활발히 쓰였고 지금은 해당 제품의 시각 아이덴티티 역할을 한다. 실제로 PS 공식 유튜브 콘텐츠들 중 상당수가 영상물 우측 하단에 4개 도형을 일종의 워터마크로 활용하고 있다.
게임패드 외형 디자인과 ‘△○X□’ 컨트롤 체계를 설계한 인물은 고토 테이유(Teiyu Goto)라는 디자이너로 1993년 소니의 PS 팀에 합류, 이후 패드뿐 아니라 기기 본체 1·2·3세대의 디자인도 담당했다. 그는 2010년 일본의 콘솔 게임 전문 잡지 『패미통(ファミ通, Famitsu)』과 인터뷰를 갖고 PS 게임패드 디자인 과정을 공개한 바 있다. ‘△’는 방향과 지시의 형태를 참고하였고, ‘○’와 ‘X’는 일반인들의 보편화된 도상적 소통에 의거해 ‘예스’와 ‘노’를 의미하며, ‘□’는 종이의 낱장을 형상화한 것으로 게임 중 메뉴 열람 등 문서와 관계된 액션을 유도하게끔 의도했다, 라는 것이 고토 테이유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십여 년 후 ‘○’와 ‘X’의 역할이 뒤바뀌는 사건이 일어난다. 2022년 말 출시된 플레이스테이션 최신 모델 PS5부터 ‘○’가 취소 버튼, ‘X’가 선택 버튼이 된 것이다. PS 게임패드의 이른바 ‘리버스(reversed) 오엑스’ 현상은 사실 오래전부터 진행된 것이라 한다.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에서는 언젠가부터 동양권에서는 O가 결정, 서양권에서는 X가 결정 버튼을 의미해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플레이스테이션5를 출시하면서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계 유저들의 불편을 감수하고 X는 ‘결정’이라고 규격을 통일한 것입니다. (중략) 결정 버튼 위치가 게임기마다 다르다보니 동서양 유저들이 골탕을 먹기도 합니다. 서양에서는 늘 닌텐도 스위치의 결정 버튼이 왜 오른쪽에 있냐며 의문을 표합니다. (중략) 도대체 언제부터 서양은 ‘결정’ 키가 아래로, 동양은 오른쪽으로 가게 된 걸까요? (중략) ‘결정’ 키가 아래에서 등장하는 게임기는 세가에서 만든 메가드라이브(1988년)에서 시초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메가드라이브는 A, B, C 버튼이 왼쪽에서부터 일렬로 나열되었죠. 닌텐도 패미컴의 B-A 순서와는 다릅니다. (중략) 플레이스테이션 등장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닌텐도 방식의 ‘결정은 오른쪽 A버튼’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에 O를 오른쪽에 넣었고, 미국 시장에선 게임패드를 쥔 손을 고려해 가장 먼저 누를 수 있는 아래 버튼을 ‘결정’으로 뒀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특히 당시 일본에서는 이미 슈퍼 패미컴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북미에서는 세가의 메가드라이브도 만만치 않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에 메가드라이브를 사용하는 북미 유저들을 고려해 ‘결정’을 아래에 넣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혜선, 「패미컴부터 플스5까지 OX가 뒤섞인 ‘버튼’의 역사」, 이데일리, 2022. 7. 11.
위 글은 ‘리버스 오엑스’ 이슈의 본질이 오엑스의 형태가 아니라 ‘오엑스의 위치’임을 밝힌다. 게임패드 하단에 배열된 ‘결정’ 키가 익숙한 서양인들에게 ‘동그라미는 예스, 가위표는 노’ 규칙은 고려 사항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대중의 사용성이 보편의 형태와 맥락을 압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시장에서는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디자인을 하든 글을 쓰든 형태와 맥락을 일원론의 가치로 삼기도 힘든 노릇이다. 그렇다고 사용성을 절대적 우성의 요소로 추구하기도 어려운 문제다.
디자이너가 디자인 모티프로 위시한 요소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고, ‘꽃이 피었다’든 ‘꽃은 피었다’든 괘념하지 않는 독자들도 적잖을 것이며, 세로를 가로로 눕힘이 신성 모독이라는 유머는 단 한 사람의 웃음도 끌어내지 못한 채 잊힐지 모른다. 형태와 맥락, 사용성,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설계 요소들. 결국은 이것들을 커다란 철제 쟁반 위에 쌓아 놓고, 그 쟁반을 윗머리로 솜씨 좋게 이고, 사람이며 오토바이며 리어카며 노천 주점이며 와글와글한 시장 한가운데를 뚜벅뚜벅 균형 있게 가로질러 나아가는 일. 디자인-글쓰기, 디자이너-작가의 태도는 아무래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책 소개(도서 콘셉트, 분량, 차례, 작업 일정 등): 바로 가기
― 다음 연재: 2024년 2월 2일 금요일
※ 연재 일정을 기존의 ‘토요일/일요일’에서 ‘매일’로 변경하였습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