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스타일리시 모던 데자인
2022년 겨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이하 모던 데자인)는 오랜 시간 소거된 채 과거의 소릿결로만 존재하던 스타일, 그리고 스타일리스트들을 소환해 낸 전시였다. 전시 자체가 거대한 음소거 해제 버튼이었다. 〈모던 데자인〉은 전시 도록 발간사의 소개문대로 “해방 이후 근대화, 산업화를 통한 국가 재건 시기 미술과 산업의 유기적 관계를 조명하는” 자리였다. 1945년 전후 및 1950~1960년대에 활약한 디자이너들, 당시 용어로는 도안가들의 방대한 작업들을 소개했다. 그중 대표성을 띤 인물이 한홍택(1916~1994)이었다.
디자인계에서 한홍택에 내리는 가장 신랄한 평가는 그를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니라 광고나 포스터 작업도 했던 화가로 보는 시각이다. 한홍택이 순수 미술과 디자인 작업을 병행했고, 특히 말년에는 유화 작업에 매진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러한 평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해방을 전후한 시점에 막 발아하기 시작한 초창기 한국 디자인의 상황 속에서의 한홍택의 디자인 작업과 역할은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회화성을 강조하며 구성적 표현을 고집한 한홍택의 작업 방식은 1970년대 중반 그가 디자인계를 은퇴하기 전부터 그 한계가 지적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활동과 역할이 폄하되어서는 곤란하다. 한홍택의 작품과 활동을 통해 우리는 20세기 초·중반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가 처해 있던 역사적·사회적·경제적 물적 조건과 상징적·문화적 조건, 그리고 그러한 상황 하에서 한 개인 디자이너의 선택을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강현주, 「한홍택 디자인의 특징과 의미: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전사(前史)」, 『디자인학연구』 제102호, 한국디자인학회, 2012. 8.
전시장에서 한홍택의 작업들을 실제로 보니 강현주 교수(인하대학교 디자인융합학과)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디지털 시대의 관객에게 그가 디자인한 포스터들은 마치 회화 작품처럼 보였다. 작업 경향 자체에 묻어난 회화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나, 그보다는 ‘손으로 그리고 붙인’ 흔적들로부터 감각되는 모필화의 특성이 더 흥미로웠다. 하기야, 지금은 어도비 소프트웨어로 처리하는 일을 과거에는 손과 붓, 가위와 풀로 행했을 테니 아무리 기계적으로 손을 써 본들 수작업의 흔적을 지우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이 같은 아날로그적 특질은 한홍택의 활동 시기를 고려할 때 신기하기는 했어도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정말로 인상적이었던 점은 도저히 한 사람의 작업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각양각이한 스타일이었다. 한국 전통문화의 상징물들을 작화하거나 인물화를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들이 있는가 하면, 현대 서체 디자이너들의 레터링과 타이포그래피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작업물도 상당수였다. 그래픽 디자이너 한홍택의 스타일은 그야말로 명사가 아니라 동사였다. 디자인 매체 에디터로서나 글을 쓰는 작가로서나 한홍택의 디자인 작업 앞에서 성찰하는 바가 컸다. 이를 긴 전시 리뷰에도 남겼는데 일부를 재록해 본다.
누구에게 어떤 작업을 의뢰 받든, 디자인(도안) 대상이 뭐가 됐든, 모두 소화가 가능했던 작업자들의 시대가 아니었나, (중략) 디자인 이론이 체계화되거나 관련 교육 기관이 정식 운영되기 이전의 시기였다. 현장의 작업자들은 저마다 다양한 스타일을 수련하고 개발하며 경쟁력을 쌓아 갔고, 차츰 여러 기법에 능숙해지는 동안 작업물들은 다채로워지고, 그렇게 시나브로 ‘근현대 디자인사’라 포괄할 만한 특정한 양식이 생성됐으리라⋯⋯.
내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 여러 스타일을 나날이 연습하며 ‘내 것’화한 현장인들이 온몸으로 짓고 그리며 밀고 나갔던 도안의 시대. 디자인 스타일도 조류도 작업자들 스스로 만들고 정립했던 도안가들의 현장. 디자인과 디자이너라는 용어가 있기 전의 이 시공간은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라는 전시장을 거쳐 오늘날의 공시성 안으로 포개진다. 뒤를 돌아보는 포즈와 앞을 향하는 시선은 그렇게 한 몸이 된다.
임재훈, 「전시 리뷰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타이포그래피 서울』, 2023. 3. 2.
고정된 스타일에 머물지 않고 어떤 작업이든 능히 해 내고야 말았던 진짜 ‘마이너리티-되기’의 무명 대가들. 〈모던 데자인〉이 미처 모시지 못한 당대 도안가들도 수많았으리라 생각한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음으로써 후대의 발굴 사업마저 나직이 겸양해 버린 우리 디자인사의 원인(原人)—근원적 인물들 말이다. 나만의 스타일이 내 이름 앞에 ‘경(Sir)’과 같은 작위로 붙기를 바라는 마음, 매 작업마다 대중의 지지와 애호를 받고 싶은 출세욕. 글 쓰는 작가로서 품었던 사심들이 〈모던 데자인〉 전시 공간 안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내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 여러 스타일을 나날이 연습하며 ‘내 것’화한 현장인들” 모두가 모던 데자인 왕국의 전하이자 폐하였다. 붓·펜으로 디자인을 그리고, 칼·가위로 이미지를 오리고 덧붙이던 시대를 향하여, 차려·경례.
― 책 소개(도서 콘셉트, 분량, 차례, 작업 일정 등): 바로 가기
― 메인 이미지: 〈모던 데자인: 생활, 산업, 외교하는 미술로〉 전시 공간, 직접 촬영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