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9장~11장)
4시, 동물원에 도착한 레빈은 심장이 마구 고동치는 걸 느끼며 마차에서 내려 산가 스케이트장으로 난 오솔길을 걸었다. 그는 그곳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차 대는 곳에서 쉐르바츠키 가의 마차를 보았기 때문이다. 청명하고 얼어붙을 듯 추운 날씨였다. 마차 대는 곳에는 사륜마차, 썰매, 삯마차, 헌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입구와 깨끗이 쓸어 놓은 오솔길은 맵시 있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붐볐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 그들의 모자가 반짝였다. 오솔길 주위에는 소용돌이무늬를 조각한 처마와 지붕 마룻대가 붙은 러시아식 오두막집이 흩어져 있었다. 동물원의 울창한 자작나무 고목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를 축축 늘어뜨렸고, 그 모습은 마치 새 축제 의상으로 아름답게 단장한 듯 보였다.
그는 오솔길을 따라 스케이트장으로 걸어가며 혼잣말을 했다. “흥분하지 마. 침착해. 도대체 왜 그래?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야? 가만히 있어. 바보 같으니!” 그는 자신의 심장에게 호소했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할수록 더욱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도중에 마주친 지인이 레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레빈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는 언덕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끌고 오르내리는 작은 썰매의 쇠사슬 소리, 쏜살같이 미끄러지는 썰매 소리, 사람들의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몇 발짝 더 앞으로 갔다. 그러자 그의 앞에 스케이트장이 펼쳐졌다. 그는 스케이트를 지치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녀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녀를 발견한 그의 마음은 기쁨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스케이트장의 반대편 끝에서 어느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복장이나 그녀의 몸짓에는 전혀 특별한 데가 없었다. 그러나 레빈에게는 이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녀를 찾는 것이 엉겅퀴 틈에서 장미를 찾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그녀로 인해 주위의 모든 것이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주위의 모든 것을 비추는 미소였다. ‘과연 내가 저기 빙판으로 내려가 그녀에게 그녀가 있는 곳이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성소처럼 여겨졌다. 순간 그는 그곳을 떠날 뻔했다. 그만큼 그는 두려웠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이성적으로 판단하려고 애썼다. 그는 그녀 주위에 온갖 사람들이 다니는 걸 보아 자기도 스케이트로 그곳에 갈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그녀가 마치 태양이기라도 한 듯 오래 보는 것을 피하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태양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모습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70~71)
그는 비록 그녀를 보지는 않았지만, 한순간도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는 태양이 자기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72)
...그리고 레빈을 알아보고는 그와 자신의 두려움을 향해 미소를 던졌다. 그녀는 한 바퀴를 다 돌자, 그 조그만 발로 빙판을 경쾌하게 한 번 차더니 쉐르바츠키에게로 곧장 미끄러져 왔다. 그러고는 그의 손에 매달려 방긋 웃으며 레빈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그녀를 생각할 때면, 그는 그녀의 모든 것, 특히 어린아이처럼 맑고 선한 표정을 띤 자그마한 얼굴과 처녀다운 가냘픈 어깨 위에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옅은 금빛 머리칼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앳된 표정은 날씬하고 아름다운 몸매와 어우러져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독특한 매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매번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바로 상냥하고 고요하고 진실한 그녀의 눈빛과 특히 언제나 레빈을 마법의 세계로 이끄는 그녀의 미소였다. 그는 그 마법의 세계에서 어린 시절에도 좀처럼 맛보지 못한 감동과 부드러움을 느꼈다. (72~73)
레빈은 일어나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오두막 옆의 거친 빙판을 따라 내달리다 속력을 다해 매끄러운 빙판으로 나오더니 힘들이지 않고 빙판을 지치기 시작했다. 마치 자유자재로 속도를 냈다 줄였다 하고 마음대로 방향을 바꾸는 것 같았다. 그는 두려움을 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가 다시금 그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었다.
그녀가 그에게 한 손을 내밀자, 그들은 천천히 속도를 내면서 나란히 빙판을 달렸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그녀는 그의 손을 더욱더 꼭 잡았다.
“당신과 함께 타면 나도 금방 배울 것 같아요. 어쩐지 당신에게는 믿음이 가요.”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날 의지하니, 나도 자신이 생기는군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곧 자기가 한 말에 깜짝 놀라 얼굴을 붉혔다. 사실 그가 이 말을 하자마자, 태양이 구름 뒤로 숨어 버리듯,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상냥함이 사라져 버렸다. 레빈은 그녀의 얼굴에서 사고의 노력을 나타내는 낯익은 흔들림을 발견했다. 그녀의 매끈한 이마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75)
’멋지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그때 mademioselle 리농과 오두막을 나서던 키티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오빠를 바라보듯 잔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과연 내가 나쁜 걸까? 정말 내가 저속한 짓을 한 걸까? 흔히 교태라고들 하지. 난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즐거운걸. 게다가 그는 너무나 멋진 사람이지. 그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그녀는 생각했다. (78)
두 친구는 호텔로 가는 동안 내내 말이 없었다. 레빈은 키티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의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면서, 때로는 희망이 있다고 확신하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진 채 자신의 희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뚜렷이 깨닫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녀의 미소와 “다음에 봐요.”라는 말을 대하고 난 후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꼈다. (80)
“자넨 알고 있지?” 레빈은 깊은 곳에서부터 빛을 발하는 두 눈동자로 스테판 아르카지치를 계속 응시하며 대답했다. (중략) 스테판 아르카지치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레빈을 바라보았다. (중략) 레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얼굴의 모든 근육이 바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88~89)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마치..... 난 지금 배가 부른데, 빵집 옆을 지나면서 빵을 훔치는 것과 똑같잖아.”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눈이 여느 때보다 더욱 빛났다.
“그게 어때서? 빵도 때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은 냄새를 풍기기도 하잖아.
‘얼마나 좋으랴, 내가
지상의 욕망을 이긴다면.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대도
난 여전히 더없는 행복을 맛보리라!’
(중략) 레빈이 가볍게 웃었다.
“그럼, 무너지지 말고.” 오블론스키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빵을 훔치지 않으면 되잖아.”(98)
∎<단상>
키티를 사랑하는 레빈의 표정과 심리 묘사는 압권이다. 그녀를 찾는 것은 엉겅퀴 틈에서 장미를 찾는 것 만큼이나 쉬운 일이며,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서 쳐다보지 않아도 그 존재를 알 수 있다고 표현한다. 어린아이처럼 맑고 선한 표정, 옅은 금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움 등 외양에 반하는가 하면, 상냥하고 고요하고 진실한 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미소는 매번 레빈을 마법의 세계로 이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심지어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 후에도 키티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며 희망이 있다고 확신하다가 때로는 절망에 빠지는 자신을 어리석다고 판단한다. “다음에 봐요.”라는 한 문장에 얹힌 그녀의 미소를 생각하며 이후로는 완전 딴 사람처럼 변하여 들뜨기도 한다. 천상 사랑의 우물에 풍덩 빠진 생쥐꼴로 그 마음과 눈빛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레빈의 내면을 따라 걷는 섬세한 문장이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오늘의 문장은 “빵을 훔치지 않으면 되잖아.”이다. 프랑스 여자 가정교사와 불륜을 저지른 스테판은 사랑에 빠진 레빈 앞에서 자기 처지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충고를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품은 레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배가 부른데 왜 빵을 훔치냐고 핀잔을 준다. 배가 불러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은 냄새에 이끌리는 욕망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합리화하는 오블론스키에게 레빈은 단호히 “빵을 훔치지 않으면 되잖아.”라며 칼침을 놓는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귀족계에서 무너진 도덕성을 레빈의 입술로 맹렬히 꾸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