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5장~8장)
모스크바의 한 관청에서 3년째 책임자의 자리를 맡는 동안, 스테판 아르카지치는 동료, 부하 직원, 상관, 업무상 그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은 물론 존경까지 받았다. 직무상의 이런 일반적인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주된 특징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사람들에 대한 극도의 관용으로, 이는 대체로 그가 자신의 결점을 스스로 잘 알았던 데서 비롯되었다. 두 번째는 철저한 자유주의로, 이는 그가 신문에서 읽고 익힌 것이 아니라 그의 피에 흐르는 것이었다. 자신이 핏속에 흐르는 철저한 자유주의로 인해, 그는 모든 사람을 재산과 신분에 상관없이 똑같이 공평하게 대했다. 세 번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그 결과 그는 결코 일에 몰두하거나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44)
수위는 곱슬머리에 어깨가 딱 벌어진 단단한 체격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양가죽 모자를 벗지도 않은 채 닳은 돌계단을 따라 빠르고 가벼운 걸음으로 뛰어올라오고 있었다. (46)
레빈은 자신이 모르는 오블론스키의 두 동료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특히 그리네비치의 우아한 손, 몹시 하얗고 긴 손가락, 끝이 구부러진 길고 노란 손톱, 루바슈카의 소매애 달린 크고 빛나는 커프스단추가 아마도 그의 주의력을 온통 흡수하여 생각의 자유마저 앗아간 것 같았다. 오블론스키는 곧 그것을 알아채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49)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젬스트보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야.” 그는 마치 지금 누군가 자기를 모욕이라도 한 것처럼 흥분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젬스트보는 장난감이니 마찬가지야. 의원들은 지금도 젬스트보에서 놀이를 벌이고 있어. 하지만 나는 장난감을 갖고 놀 만큼 젊지도, 늙지도 않았어. 어떻게 보면(그는 말을 더듬었다) 젬스트보다는 현 내의 패거리들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전에는 감독청이나 재판소가 그렇더니, 이제는 젬스트보가 그 꼴이야..... 그것도 뇌물의 형태가 아니라 봉급의 형태로 말이지.” 그는 마치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자기 의견에 반박하기라도 한 것처럼 맹렬히 말했다. (중략) 레민은 그리네비치의 손을 혐오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스테판 아르카지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중략) 레빈은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그 모습은 어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약간 얼굴을 붉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소년들이 자신이 수줍음 때문에 놀림감이 되었다고 느껴 그로 인해 수치스러워하고 더욱더 얼굴을 붉히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려 할 때처럼 그렇게 새빨개졌다. 그의 총명하고 늠름한 얼굴이 그토록 어린아이처럼 변하는 것이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져, 오블론스키는 그를 더 쳐다보지 않았다. (50~51)
레빈은 청춘을 함께 보낸 친구였다. 성격이나 취향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은 청년기에 만난 친구들이 서로 사랑하듯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종종 그러하듯, 그들은 이성적으로는 상대방의 활동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것을 경멸했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이 선택한 삶이 진정한 삶이고 친구가 택한 삶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블론스키는 레빈을 보고 가벼운 조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시골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온 레빈을 이미 여러 차례 만났다. 레빈은 시골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테판 아르카지치는 아직도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레빈은 모스크바에 올라올 때마다 언제나 흥분했고 조급해했고 다소 갑갑해했고 이런 갑갑함에 화를 냈고 종종 사물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미처 예기치 못한 시각을 드러내곤 했다. 스테판 아르카지치는 그 점을 비웃으면서도 마음에 들어 했다. 레빈도 마음속으로는 친구의 도시적인 생활 방식과 직업을 경멸했다. 그는 친구의 직업을 하찮게 생각했고 그것을 비웃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진정한 차이는, 오블론스키가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면서 자신만만하고 선량한 태도로 조롱하는 데 반해 레빈은 자신 없고 간혹 성난 듯한 모습으로 조소한다는 점이다. (48)
∎<단상>
4장~8장 중에서 4장이 유심히 읽힌다. 본인이 애쓰는 노력없이 정부조직의 고관인 처남의 영향으로 책임자 관료가 된 오블론스키와 시골에서 도의회(자치회) 의원을 그만두고 노동하는 농업에 관심이 있는 레빈과 상반되는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춘을 함께 보낸 친한 친구이면서도 시골뜨기와 관료쟁이로 서로가 각각 비웃고 경멸하거나, 조롱하고 조소를 띄는 모습을 첨예하게 잘 묘사했다. 게다가 톨스토이의 철학을 대변하는 레빈은 관료의 ‘우아한 손, 몹시 하얗고 긴 손가락, 끝이 구부러진 길고 노란 손톱, 루바슈카의 소매에 달린 크고 빛나는 커프스단추’를 하나하나 언급하며 혐오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인상적이다.
그러면서도 오랜 귀족 가문으로 인연 깊은 쉐르바츠키 가의 셋째 딸 키티를 사랑하는 레빈의 모습은 분명 수줍음이 많은 서른두 살의 시골 노총각이다. 스스로 ‘부족하고 못난 남자, 뚜렷한 직업도, 사회적 지위도 없는 남자, 사냥하고 건물 짓는 지주, 무능한 사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일에 매달려 있는 남자’로 자기를 비하한다. 하지만 용기내어 오블론스키의 처제 키티에게 청혼하러 모스크바까지 온 남자다. 앞으로 어떻게 청혼 서사가 전개될지 관심을 끈다.
간간이 톨스토이의 유물론적 관점도 보인다. 레빈의 형 코즈니셰프와 하리코프에서 온 철학 교수의 논쟁으로 짧게 들려준다. ‘인간의 활동에서 심리적 현상과 생리적 현상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경계는 어디인가’라는 문제에 교수는 유물론자들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존재에 대한 의식은 모든 감각의 총체에서 나오고, 존재에 대한 인식은 감각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감각 없이는 존재에 대한 개념도 없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레빈은 감각과 육신이 없으면 존재도 없는 거냐고 반박한다. 아마도 톨스토이는 레빈의 목소리로 본인의 생각을 설파했을 것이다. ‘자료가 없을 뿐’이라며 논쟁을 흐지부지 마무리하고 마는 상황처리 방식이지만 150년 전 톨스토이와 그 당시 지식인들의 시대적 고민이 아직도 유효하다니 새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