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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줄의 힘

정리움, 아버지는 국화가 한창이었다.

by 다섯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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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 선생님 같은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당번을 정해주고

뙤약볕 아래 국화에 물을 주게 했다


국화처럼 사람들이 만개한 가을마당

잘 웃지 않는 아버지 입가에

노란 웃음이 피었다


아버지는 국화가 한창이었다”

이삼일에 한 번씩은 책방엘 간다.

오늘은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해질녘에 달렸다.

그중 한 권은 <나는 잘 있습니다>이다.

정리움 시인이 썼다.

초창기 선배 작품이고 우선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잘 있습니다’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명대사

“오갱키 데스카‘에 답하는 문장 같다.

먼저 떠난 지인이 시인에게 이렇게 안부를 물으면,

”네 저는 잘 있습니다.“

”저는 안녕합니다.“

라고 답하는 내용이 가득할 것 같은 시집 제목이다.

누군가 먼저 읽은 이가

후기를 감동적으로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문한 책 세 권을 들고 책방 구석에 서서 시집을 펼쳤다.

순서가 필요 없는 책은 주로 뒤에서부터 읽는 습관이 있다.


어릴 적 젓가락질이 서툰 시인에게 아버지는 늘 타박을 주었다.

이제 연로하신 아버지는 생선 한 점도 제대로 집지 못하고

같이 늙어가는 딸 눈치를 본다.

교련 선생님처럼 늘 엄격하기만 했고

잘 웃지 않는 아버지 입가에

국화처럼 노란 웃음이 피어난다.

’아버지는 국화가 한창이었다‘


시 한 줄에 온몸이 녹아내린다.

책방 창문 밖에는 겨울 바람이 어지럽고

창문 안으로는 적당한 온기가 흐르지만

커피 한 잔으로 눌러 앉히는 힘은

시 한 줄이다.

한 줄 글이 마음을 흔들고

몸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꾼다.




<문상>


오래 연락이 끊어진 지인의 시모상 소식을 들었다

갈지 말지 아주 잠시 망설였다

그녀와 묵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밀쳐두고 위로하고 위로받아야 할 일이라

징검다리도 없는 시간을 건넜다


하루가 저물고 밤이 내려앉았다

한강철교 조명이 물 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이름을 부르며 들어섰다

상복을 입고 서 있는 나와 동생을 향해 걱정

모든 울음이 부르는 내 이름은

엄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상가에 들어서니 그녀의 성장한 자녀들이 먼저 반겼다

죽은 자가 만들어 준 이 시간

나도 그녀도 망자에 기대 잠시 울었다


바뀐 전화번호를 주고받지 않았다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다시 보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녀도 나도 알았다


먼 어느 날

우리는 또 낯선 시간의 슬픔에 기대 서로를 울 것이다



시인의 다른 시를 하나 더 옮겼다.

난해하지 않고

가볍지 않아서 좋다.

달뜬 감정이 아니고

어지럽지 않은 시문이라서 좋다.

가까운 나의 시간과 닮아서 옮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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