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섯손가락 Apr 04. 2024

시 한 줄의 힘

정리움, 아버지는 국화가 한창이었다.



“...교련 선생님 같은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당번을 정해주고 

뙤약볕 아래 국화에 물을 주게 했다


국화처럼 사람들이 만개한 가을마당

잘 웃지 않는 아버지 입가에

노란 웃음이 피었다


아버지는 국화가 한창이었다” 

이삼일에 한 번씩은 책방엘 간다. 

오늘은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고 해질녘에 달렸다.  

그중 한 권은 <나는 잘 있습니다>이다. 

정리움 시인이 썼다. 

초창기 선배 작품이고 우선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잘 있습니다’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명대사

“오갱키 데스카‘에 답하는 문장 같다. 

먼저 떠난 지인이 시인에게 이렇게 안부를 물으면,

”네 저는 잘 있습니다.“

”저는 안녕합니다.“

라고 답하는 내용이 가득할 것 같은 시집 제목이다. 

누군가 먼저 읽은 이가 

후기를 감동적으로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문한 책 세 권을 들고 책방 구석에 서서 시집을 펼쳤다. 

순서가 필요 없는 책은 주로 뒤에서부터 읽는 습관이 있다.  


어릴 적 젓가락질이 서툰 시인에게 아버지는 늘 타박을 주었다. 

이제 연로하신 아버지는 생선 한 점도 제대로 집지 못하고

같이 늙어가는 딸 눈치를 본다. 

교련 선생님처럼 늘 엄격하기만 했고 

잘 웃지 않는 아버지 입가에

국화처럼 노란 웃음이 피어난다. 

’아버지는 국화가 한창이었다‘ 


시 한 줄에 온몸이 녹아내린다. 

책방 창문 밖에는 겨울 바람이 어지럽고

창문 안으로는 적당한 온기가 흐르지만

커피 한 잔으로 눌러 앉히는 힘은 

시 한 줄이다. 

한 줄 글이 마음을 흔들고 

몸을 움직이고 

세상을 바꾼다.   




<문상>


오래 연락이 끊어진 지인의 시모상 소식을 들었다

갈지 말지 아주 잠시 망설였다

그녀와 묵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밀쳐두고 위로하고 위로받아야 할 일이라

징검다리도 없는 시간을 건넜다


하루가 저물고 밤이 내려앉았다

한강철교 조명이 물 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이름을 부르며 들어섰다

상복을 입고 서 있는 나와 동생을 향해 걱정

모든 울음이 부르는 내 이름은

엄마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상가에 들어서니 그녀의 성장한 자녀들이 먼저 반겼다

죽은 자가 만들어 준 이 시간

나도 그녀도 망자에 기대 잠시 울었다


바뀐 전화번호를 주고받지 않았다

다시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다시 보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녀도 나도 알았다


먼 어느 날

우리는 또 낯선 시간의 슬픔에 기대 서로를 울 것이다 



시인의 다른 시를 하나 더 옮겼다. 

난해하지 않고

가볍지 않아서 좋다. 

달뜬 감정이 아니고

어지럽지 않은 시문이라서 좋다. 

가까운 나의 시간과 닮아서 옮겨 둔다. 


작가의 이전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