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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Apr 26. 2024

2-1. 그날을 기억한다꼬?

함께 기억 같이 위로

아버지는 세 살 난 딸을 두고 가셨다. 어디로 가셨을까? 젊다 못해 어린 스물일곱의 육신은 동네 뒤 선산에 묻혔건만 그 영혼은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해할 수도, 수긍할 수도, 적응할 수도 없는 현실을 부정하며 어린 딸한테 어머니는 아버지가 부산에 갔다고 했다. 그 시절 부산은 요즘 뉴욕만큼이나 멀고 번화한 도시였다. 작은집 철부지 아재가 “너그 아부지는 하늘나라 갔다.”라고 일러주기 전까지는 그렇게 알고 지냈다.


그렇게 아버지 안 계신 집에 우리는 사 대가 살았다. 주민등록증에 ‘88’로 시작하는 증조할머니, 내가 태어난 해에 환갑이셨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보다 한 살이 더 많으신 할머니, 스물에 시집와서 스물셋에 딸을 낳고 스물다섯에 혼자된 어머니, 나 그리고 일꾼 아재들. 식구는 많지 않아도 수시로 드나드는 객식구가 있고 집안 행사가 많았다.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되면 사촌들이 어김없이 왔다. 인근 도시에 사는 사촌들은 방학하는 날 와서 개학하기 전날 떠났다. 덕분에 나는 방학에도 늘 외롭지 않았고 집안은 언제나 시끌벅적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북적이는 한바탕 잔치가 끝나면 우리 집은 절간처럼 조용해졌다. 식구들은 온통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어른들뿐이었다. 은빛이 흐르는 모습만큼 정갈하고 조용하셨다. 그런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할머니는 해질녘이면 발작을 일으키곤 했다.


“내 막내이는 어디 있노~~ 내 새끼는 어디 갔노~~ 내 새끼 잡아먹은 년은 어디 있노~~~!”


라며 큰마당에 퍼질러 앉아 땅을 치며 가방 방문을 향해 악다구니를 질렀다. 그리고는 신고 있던 흰 고무신을 벗어들고는 문살이 가지런한 방문으로 홱 집어던졌다. 고무신은 문살 사이에 정확하게 날아서 화살처럼 꽂혔다. 어머니는 소복차림으로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방 안에서 울음 섞인 소리로 웅얼거리고는 이내 몸져눕고 말았다. 처음엔 얼굴이 붓고 손발도 붓고 나중엔 온몸이 부었다.


구한말에 태어나신 증조할머니는 여러 약재를 구해서 엄마한테 달여 먹였다. 지네술과 뱀술, 온갖 약초를 빚어서 만든 환... 집에서 만든 약은 오만 가지가 소용없었다.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창몰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오셨다. 그 약사는,


“이 약도 좋지만 보리미음을 끓여서 드시는 게 더 좋을 낍니더.”


라고 했단다. 그의 말대로 보리죽을 끓여서 먹고는 엄마는 차츰 차도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할머니의 악다구니와 엄마의 웅얼거리던 울분,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 무렵 짙어지는 무거운 회색 기운을. 그리고 방 문살에 화석처럼 새긴 자국. 그 고무신이 잘라먹은 문살은 영영 다시 채워지지 않고 빈자리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그 집을 떠나올 때까지... 아마도 그 집은 마지막 스러질 때까지 아무도 돌보지 않아 하얗게 뚫린 문짝을 흉터처럼 품고 갔을 것이다.


할머니는 책을 좋아하셨다. 인근 도시에서 교사를 하시던 큰아버지는 당신 어머니가 책읽기를 즐겨하신다고 늘 학교 도서관에서 다양한 책을 들고 오셨다. 신일문화사인지 신구문화사인지 하늘색 표지나 회색빛 표지로 된 그리스로마신화나 고전소설류를 가지고 오셨다. 할머니는 그중에서도 그리스로마신화, 숙향전, 삼국지를 읽고 이야기를 술술 엮어내시곤 했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 이야기가 재미있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들려도 내용은 남지 않았다. 할머니 흰 고무신과 두꺼운 책 중에서 어느 것이 할머니를 닮았는지 오랫동안 헷갈렸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엄마는 그날을 회상하며 말씀하셨다. 처음 언급한 날은 수십 년이 흐른 뒤였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떨리고 장마에 늘어놓은 수건처럼 젖어 있었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음도 몸도 추스르기 힘들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어린 나이에 지아비를 잃고 방문 밖을 나가기도 창피해서 숨어지내던 시간이었다고. 그런 엄마 마음을 모르고 할머니는 험한 말씀을 마구 쏟아부었다고. 서운하고 아팠다고.


나도 그날을 기억한다 했다. 할머니가 어떻게 했는지 그 말과 행동에 대해.


“오. 그래. 니가 그날 일을 기억한다꼬?”


얼마 후 다시 그날을 얘기할 땐 달랐다. 이번에도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날카로웠던 순간을 누군가 기억한다는 말만 듣고도 수십 년 동안 상처 났던 마음이 아물어진 듯했다. 그 당시 서운했다고 아팠다고 했던 어투는 감물처럼 희미한 흔적만 남긴 채 점점 동그래지고 있었다. 


“너그 할무이도 얼매나 어처구니가 없었시모 그랬겠노. 따신 밥 잘 묵고 나간 생때같은 아들이 그리 돌아왔으니... 하루 아침에 없어졌으니...”


그때 엄마 말씀은 할머니마저도 이해하며 위로하고 있었다. 심지어 더 가엽게 여기며 안쓰러워하지 않는가. 폭풍우가 지난 뒤 구름 속에 숨어 있던 햇살이 비집고 나오듯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늘진 곳의 말과 기억은 그렇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기억만 해줘도, 같이 잊지 않고 있다고 말만 해도 치유가 된다. 나도 알고 있다고,함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상처가 아물고 회복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너그 할무니가 내가 누워 있을 때 방문 앞에 와서 조용히 사과도 했다.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꾸마. 고마 떨치고 일어나거라...'라고 말씀하시더라."


이런 새로운 장면도 찰랑찰랑 건져 올리지 않는가. 게다가


"너그 할무니는 책을 많이 읽어서 참 현명하셨던기라. 시모가 며느리한테 사과하기는 쉽지 않을낀데... 그러고 나서는 두 번 다시는 그런 말씀을 안 하셨제..."


라고 조곤조곤 말을 이으셨다.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내 귀에 새기고 딸 마음도 짚어가며 어루만지셨다. 사소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이야기. 


오랫동안 구석진 곳에 처박아 두었던 아픔은 햇살 좋은 봄볕에 꺼내어 깨끗이 씻어 말려야 한다. 눈앞으로 소환하여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같이 살피고 어루만져야 한다. 함께하는 기억만으로도 아픔은 치유될 수 있다. 함께 울어야 같이 웃을 수 있다. 


그 대화 이후로 엄마는 한결 마음이 편해지신 듯했다. 딸을 반기는 낯빛도, 흐르는 대화 속 문장도 어린아이 발걸음처럼 가벼웠다. 엄마와 더 많이, 더 자주 대화하지 못한 지난날이 후회스럽지만 지금도 많은 기억을 딸은 간직하고 있으니 그곳에서도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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