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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Apr 28. 2024

2-3. 찰주먹밥과 삼강오륜

할머니는 정갈하셨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고 명절이면 유과를 직접 만드셨다. 재봉틀로 가족들 한복을 직접 지으셨다. 어두운 백열등 불빛에도 싱가 재봉틀 앞에 앉아 여러 옷을 지으셨다. 할아버지 바지와 저고리, 두루마기는 물론이거니와 할머니 두 분 평상복과 손녀 명절 한복까지 척척 완성하셨으니 그 솜씨는 천상에서 베 짜는 선녀가 강림한 듯했다. 


등받이도 없는 나무 의자를 놓고 앉는 키다리 재봉틀은 ‘싱가’ 이름 그대로 노래를 불렀다. 스르릉 스르릉 바퀴가 돌 때마다 노래하듯이 가락이 살아났다. 줄박음질을 할 때는 내리달리며 빨랐고, 모서리를 돌 때는 천천히 조심조심 살피는 아기 걸음이었다. 할머니 부름에 쪼르르 달려가면 키를 재고, 품을 안아보고, 어깨와 팔길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면 색동 고운 저고리와 공단 치마가 길게 내 몸을 두르고 반짝였다. 


한복마다 동정을 다는 일은 엄마몫이다. 설이나 추석, 혼례를 앞두고 엄마는 흐릿한 십오 촉 백열등 아래서 바느질을 했다. 동정 끝이 가지런히 맞아야 하는데 안 맞으면 다시 뜯기도 하고 바늘을 꽂기 전에 미리 이쪽 저쪽으로 끝을 맞추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저고리 동정이 얇은 것은 할머니 저고리에, 넓은 것은 할아버지 저고리와 두루마기로 갔다. 동정 끝이 조금만 비뚤어져도 할아버지 노기가 승천하는지라 특별히 신경쓰는 부분이다. 엄마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곧바로 할머니 앞으로 넘겼다. 시아버지 눈살 찌푸리는 모습을 보기가 두려웠음이다. 엄한 시집살이, 혹독한 아낙네 안살림이 늘 그랬다.


할머니는 유과도 만드셨다. 제사상이나 다과상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네모모양 반듯하게 흰 유과를 튀겨내는 할머니 솜씨는 누구나 감탄했다. 찹쌀 반죽한 유과 반대기를 적당한 크기 네모로 잘라서 말린다. 유과를 만드는 날에는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고 기름을 달구었다가 식히면서 살짝살짝 튀겨 골고루 부풀린다. 그 시간과 온도와 강도가 유과 맛을 좌우한다. 살짝 튀어 오르면 한번 뒤집어 곱게 앞뒤 균형을 맞춘 뒤 할머니는 그 결정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꺼낸다. 조청을 바르고 튀밥에 살살 굴리면 유과가 된다. 명절이나 제사에 오는 손님들도 유과에 대해선 모두 한마디씩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과가 어찌 이리도 부드럽고 고소할까예.”


엄마도 할머니 다디단 솜씨를 전수받으려고 수없이 도전했지만 할머니만큼은 안 됐다. 할머니 솜씨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였음이다.


그만큼 할머니는 솜씨가 좋았다. 엄마가 부엌이나 밖에서 큰 동작으로 시원시원하게 일을 척척 하는 반면, 할머니는 방 안에 앉아서 사부작사부작 혼자서 하는 일을 잘하셨다. 그 시절에는 제사 음식을 모두 집에서 만들어야 했다. 떡도, 곶감도, 유과도, 가락엿도, 시루떡과 인절미도 두 고부가 나눔하여 같이 해결했다. 


낮 동안 바빴던 노동이 쉬는 밤에는 제사상에 올리는 수리미 차례다. 문어는 양이 적으므로 할머니와 엄마는 수리미를 썼다. 마른오징어를 촉촉하게 수분을 조금 머금게 한 후, 다리는 뜯어내어 탕국에 넣고 몸통을 세 갈래 혹은 다섯 갈래로 나눈다. 숫돌에 날렵하게 날을 세운 힘 좋은 칼로 국화 꽃잎을 한 잎 한 잎 오려서 한 송이씩 피운다. 수리미 한 마리는 국화꽃 한 다발로 북어 위에 얹어 제상에 탐스럽게 오른다. 


할머니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찰주먹밥이다. 어릴 적 입이 짧았던 나는 그 주먹밥만 있으면 몇 개씩 먹으며 배를 채우곤 했다. 찹쌀을 물에 불렸다가 꼬드밥(고두밥 – 아주 되게 지어 고들고들한 밥)으로 찐다. 소금과 설탕으로 적당히 간을 맞춘다. 이때 간을 맞추는 솜씨가 관건이다. 입맛을 최대한 유혹할 정도로 단맛과 짠맛 비율을 맞추는 게 아주아주 중요하다. 엄마는 끝내 그 비법을 알아내지 못한 듯했다. 입 짧은 어린 나에게 할머니가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이 달달 간간한 찰주먹밥이다. 


뭐니뭐니해도 할책은 머니 삶에서 빠지면 안 된다. 꽃 피는 봄에도, 못짐이 논에 둥둥 떠 있는 농번기에도, 땀이 비 오듯이 흐르는 여름에도, 추수철 가을에도, 찬바람이 잉잉거리는 한겨울에도 할머니는 책을 읽으셨다. 삼국지, 그리스로마신화, 고전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티비가 귀하던 시절, 라디오 삼국지를 들으시고 책으로도 삼국지를 읽으셨다. 영특한 외손자와 유비, 관우, 장비, 조조, 제갈량과 조자룡, 여포까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일품이었다. 


“너그 할무니는 숙향전을 우찌 그리 재미나게 이야기하시던지...”


엄마의 그 시절 회고담에 빠지지 않는 내용이다. 


“자손들은 그 누구도 너그 할무니만치 책 읽는 아아가 없었다.”


거기에 이어 


“나중에는 성경을 몇 번이나 읽고는 필사를 하는데 붓이 닳아서 몽당붓이 됐다아이가?”


로 언제나 한결같이 마무리했다. 


할머니 책 읽는 소리는 중얼중얼 음률이 살아났다. 시골 학교 교장실에서 들리는 교장 선생님 글 읽는 소리와 같았다. 그때는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옆 친구한테 할머니 자랑을 하기도 했다. 교장 선생님 모습이랑 우리 할머니가 같다고.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면에서 일하셨다. 육이오 전쟁통에 증조할머니가 온 동네를 돌며 탄원서를 만들어 인민군 숙청을 면하셨다. 뒷마을로 넘어가는 동네 뒷산 먼당에서 매일같이 총성과 함께 유명을 달리하셨던 어른들이 집집마다 있었다. 큰아들을 끔찍이 아끼시는 증조할머니셨기에 더더욱 긴장하고 애를 쓰셨고 그 노고 덕분에 할아버지는 살아남으셨다. 


할아버지는 주로 사랑에 계셨다. 할아버지가 부저(벨)을 삐익 눌러 부르시면 누군가 달려간다. 어린 손녀를 부르시면 심심하시다는 뜻이다. 손녀가 사랑으로 나가면 먼저 마루에서 큰절, 평절을 시키신다. 예절교육이었다. 절하는 속도는 찬찬히 해야 했고, 두 손은 포개어 눈과 눈썹 사이에 맞추고 시선은 발끝 앞에 두고 양반다리로 큰절을 했다. 좌우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할 때까지 엎드리는 게 관건이다. 작은절은 아이한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 절 받는 대상이 어른이기에 큰절이 아이가 우선 배워야 할 예법이었다.


할아버지가 "큰절~~, 작은절~~"이라고 부르시는 하명에 따라 절을 하고 이어서 삼강오륜을 읊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천천히 자애롭게 물으셨다.


“삼강이 뭐꼬?”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입니더.”

“그럼, 오륜은 뭐꼬?”

“부자유친, 군신유의, 장유유서, 부부유별, 붕우유신입니더.”


그러고 나서 그 뜻을 조목조목 읊어내면 화선지에 먹물이 스미듯이 할아버지 미소는 사르르 번졌다. 그 답으로 할아버지는 서랍에서 사탕이나 엿을 내어주셨지만 어린 나에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고요한 미소와 따뜻이 안아 주시는 할아버지 품이면 족했다.


그러다가 먹을 갈기도 하고 잔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금강산 유람가셔서 사 오신 할아버지 전용 벼루는 크기는 작아도 결이 고왔다. 사용한 연륜만큼 구석구석 먹물이 끼었고, 먹을 간 길 따라 가운데가 둥그스름하게 타원형으로 닳은 모양이다. 물은 연청색 연적에 뽀글뽀글 소리가 멎을 때까지 가득 담았다가 흘러내리지 않게 양을 조절하여 경상에 올렸다. 먹을 갈 때는 밖으로 먹물이 흐르지 않고 검고 짙은 먹물이 만들어질 때까지 오래 갈아야 했다. 손녀를 귀애하신 만큼 언제나 칭찬에 잔잔한 미소도 함께 얹어주셨다.


바깥 외출은 가끔 하셨다. 뒷터, 대숲밑 큰집으로 가시곤 했다. 제사가 있으면 제숫거리를 들고 가시기도 하고 지방문(지우)을 써서 가시기도 했다. 그러면 줄달린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으시고 안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마지막에 중절모를 올리시면 외출 단장은 마무리된다. 큰집에 도착하면 할아버지보다 더 큰할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 할아버지 곁에 앉아서 기다렸다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되돌아온다. 


간간이 웃골로도 오르셨다. 논밭과 선산이 있는 곳이다. 동네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당산나무를 지나 좁은 농로를 꼬부랑꼬부랑 타고 오르면 웃골이다. 층층이 늘어진 논밭을 지나고 오솔길을 오르면 백일홍이 넓게 가지를 늘어뜨리며 크게 안는다. 증조할아버지 산소를 지나 안쪽으로 아버지 산소가 있다. 먼저 간 막내아들 누운 자리를 돌며 늙으신 아버지가 풀을 뽑고 어루만진다. 


“아이고, 수길아....”


라고 조용히 울먹이시기도 하고 어떨 땐,


“욕심 많은 놈, 지 애비 묫자리까지 탐내는 놈. 욕심 많은 놈....”


으로 콧물을 훌쩍이며 웅얼거리던 할아버지 말씀이 귓전에 뱅뱅거리며 돈다. 검은색, 흰색, 붉은색. 삼색 흙이 나오고 옆으로 물이 흐르는 곳. 좌청룡우백호라 하던가. 할아버지 누우실 자리를 미리 잡아 두었는데 아버지가 먼저 가서 누워 버렸다. 


가끔은 도회지 큰아들한테도 다녀오셨다. 가을에 추수한 뒤이거나,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시거나, 외지 구경을 하고 싶으시면 가시는 외출이다. 마지막으로 걸음하실 때에는 손녀를 위한 선물을 하나 사오셨다. 그 전까지는 과자종합선물세트나 인형이나 소꿉놀이였지만 학교를 다니고 공부할 시기라고 생각하셨는지 지도책을 들고 오셨다. 키만큼 큰 반절지에 ‘대한민국전도’와 ‘세계전도’라는 글씨가 박혔다. 지도를 처음 본 나는 이게 뭐냐고 수없이 반복해서 질문을 던져도 이해하지 못할 답만 들었다.


“우리나라 지도아이가?!”

“우리나라가 이리 생깄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땅이 아주 넓은데 작게 줄이고 줄여서 그림으로 작게 그려 놓은 기다.”


...

그 어느 대답도 어린 나를 이해시키지 못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허리가 구부정한 게 너그 할무이아이가?!”


라고 일축하시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뒷면에는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간단 회화가 있었다. 한글 발음과 같이 나란히. 그 한글을 또박또박 읽고 외워서 학교 갔더니 순식간에 삼 개 국어를 구사하는 천재가 되었다. 아득히 먼 그 시절에 그렇게 소리내어 웃으며 지내는 시간도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으시면 손걸레를 들고 조용히 사랑으로 나가셨다. 이쪽저쪽 마루를 닦으시면서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셨다. 할아버지는 방에서, 할머니는 마루에서. 그런 모습을 손녀도 보고 며느리도 보았으니 그대로 보고 배우지 않겠는가. 엄마도 할아버지께 의논할 일이 있으면 그대로 할머니처럼 걸레를 들고 간간이 사랑채 마루를 닦곤 했다. 


엄마가 떠나신 지, 네 해. 요즘도 아버지 산소에 자주 간다. 엄마가 함께 계시니 더욱 그렇다. 도착하자마자 풀 뽑기는 그 옛날 할아버지한테 배운 몸짓이다. 자동으로 따라 하는 동작이다. 아무래도 가르침은 일상에서 몸으로 배우는 듯하다. 눈으로 담고, 몸으로 익히고.


엄마는 어린 딸이 어른들 품에서 꽃처럼 사랑받고 자라기를 바라셨다. 푸르고 고운 세월을 조용히 가슴으로 누르며 안고 산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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