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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로운 뉴욕의사 Nov 23. 2020

인생의 대선배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

당신의 삶의 기쁨은 무엇인가요?

한 달 간의 홈 호스피스 로테이션의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아침에 여유가 있을 때는 일어나면 5분 명상, 5분 상체 요가, 5분 하체 요가로 가볍게 하루를 시작하는데,

내가 애용하는 유튜브 요가 영상에서 명상 마지막 부분에,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할 일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텍스트화 하여 봅니다"

라는 부분이 있다. 명상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해 보는데, 그 날의 아침에는 그저 이렇게 살고 있는 인생이 감사하여 Life, 인생이라는 단어를 텍스트화 해 보았다.   




그 날 나의 홈 호스피스 방문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분은 90대의 혼자 사시는 의사 할머니다. 사전 미팅에서 할머니 엄청 까다로우시다고 미리 귀띔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만나 뵈니 정말로 성격 있으셨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컵은 어디 있으니 물은 어떻게 떠 오고 네가 거기 앉아 있으면 빛이 너무 밝아서 내가 잘 안 보이니 창문의 블라인드는 저렇게 치고 너는 이 각도로 여기에 앉아라....  


처음에 할머니가 방에서 걸어 나오실 때는 솔직히 좀 놀랐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마르셔서 뵙는 순간 해골이 걸어 나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고령 환자분들의 고충 중 하나는 몸 상태가 안 좋으시면 식사를 잘 못하시게 되는데 이러면 살이 엄청나게 빠지신다. 맨날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사는 우리야 우와~ 할 수도 있지만 여러모로 쇠약하신 어르신들께서 이렇게 되면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질 수 있기 때문에 좀 걱정이 되었는데 이어지는 할머니의 일과를 들어보니 엄청 액티브하신 분이셨다.

90이 넘은 나이에 아직도 매주 수요일마다 필라테스를 하시고, 가정 도우미 서비스도 보험 커버가 되어서 더 쓰실 수도 있는데 할머니 본인께서 다른 건 직접 하신다고 일주일에 딱 2시간밖에 안 쓰신다. 부엌도 리노베이션 한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완전 모던 인테리어 디자인에 먼지 하나 없다. 아니, 내 또래 친구들도 집 리노베이션하고 나면 다들 몸져 드러눕던데... ;;;  이런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할머니, 의사라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전공이 뭐셨어요?

"심장내과"

우와~ 심장내과는 지금도 여의사가 드문 대표적인 과 중에 하나인데 할머니 때는 훨씬 더 하셨을 텐데? 할머니 진짜 대단한 분이시네요~ 어떻게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셨어요?

"그렇지, 그랬었지. 그런데 이제는 새로운 세상이 오고 있잖아."

 


할머니는 내가 잘 아는 유수의 병원들에서 수십 년을 근무하시다 몇 년 전에 은퇴하셨단다. 헉 그럼 80대까지 일하신 거다. 우리 병원 심장내과 과장이 누구냐고 물어보시길래 말씀드렸더니, 아~ 잘 알지. 하시면서 마치 옆집 사는 친구 이야기하듯 줄줄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심장마비를 전문으로 하셔서 지난 수십 년간 일어난 심장마비 치료의 변화들을 줄줄 읊으시고, 나는 내가 응급실에서 해 오던 그 치료들이 지금처럼 자리 잡히기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살아오신 산 증인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 그렇게 액티브한 삶을 사셨는데 은퇴하시고 나면 심심하지 않으세요?

아니? 안 심심해~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문득 그런 할머니의 현재 삶의 기쁨은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살짝 여쭈어보았다.


삶의 기쁨? 삶 자체가 기쁨이야. Life.





나에게 주어진 하루의 이 시간을 나는 얼마나 소중히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나.

감사하며 매 일분일초를 누리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의미 없이, 때로는 불평불만으로 허비해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지금의 이 순간순간들이 모여서 하루가 되고, 또 내 인생이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 위와 같은 점들을 되새겨보았더니, 평소에는 빨리 끝내고 해치워버려야겠다는 마음으로 후다닥 하던 일들이 정말로 그 과정 하나하나를 음미할 수 있는 즐거움으로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90대의 삶의 끝자락에 계신 인생의 대선배님께서 그 날 나에게 가르쳐 주신 교훈이었다.


(사진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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