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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하늘 Nov 14. 2024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요즘 직장일로 인해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까지 관내에 있는 교육기관을 두루두루 방문하고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밖에서 보면 원어민선생님을 인솔하는 행정직 직원으로 보이지만 교실에 들어가서 수업분위기를 파악하고 각 반마다 벌이지는 수준 격차로 인해 못 따라가는 학생들에게 영어를 번역해 주는 일과 영어단어의 뜻이 우리말로도 이해하기 힘들 경우 자세히 풀어내서 설명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수업시간 선생님 말을 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학생들을 날카로운 눈을 치켜뜨며 노려보기도 하고 수업시간 엎드려 있는 학생에게 달려가 짧은 영어실력으로 피곤한지 물어보고는 잠을 깨우기도 한다.

    

나뭇잎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는 학생들과 깍듯하게 인사해 주는 학생, 똑똑한 아이를 만나면 저 아이는 집에서 어떻게 교육을 시켰길래 저렇게 뛰어날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학생, 반면에 예의 없게 행동해서 내 얼굴을 뜨겁게 만드는 학생들도 있다. 또 원어민 선생님의 수업을 날카롭게 평가해 주시는 선생님도 있고 우리가 오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며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시는 선생님도 만난다.     

왁자지껄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어 높은 텐션을 유지시키며 내 에너지를 마구마구 뺏어갈 때면 직장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한숨을 돌리기도 하고, 학생들이 원어민 선생님을 좋아해서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선생님이 생각하는 흐름으로 가기 때문에 그날 수업은 완벽하다. 출발하는 차 안에서 원어민 선생님들과 웃음꽃을 피운다.

활기찬 병아리 같은 유치원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고사리 손을 뻗으며 안아달라고 쫓아오면서 다음에 또 보자고 재차 확인한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들이라 그 귀여움 속에 빠져들 때도 있다.

지금의 학생들을 볼 때면 하이텐션을 자랑하던 작년 우리 반 아이들 생각도 나고 지금은 아이들 기억 속에 나란 존재는 아주 작겠지 라는 생각이 드면 약간은 서운하면서도 당연한 거다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아이들 눈에 어떤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걸까 라는 생각과 때로는 나의 학창 시절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하하 호호 떠들고 놀았던 기억, 우리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을 만나면 내 새끼가 문득문득 생각난다.

특히 미취학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사랑스럽지만 나에겐 힘겨웠던 시절이 떠오른다.

충동적이고 과잉행동으로 유치원에서 자주 전화가 걸려왔던 큰 아이와 발달이 또래보다 한참 느린 것 같다며 특수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에 다녀야 된다고 주장했던 어린이집 원장선생님, 이 아이는 또래들과 어울리기보다 한 살 어린 친구들과 가야 된다며 말씀하셨던 선생님도 함께 말이다.     

절대로 어린이집, 유치원 같은 기간을 탓하는 말은 아니다. 선생님들의 노고가 정말 많이 느껴지니까. 저 힘든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난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유치원선생님은 못할 것 같다.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주시지만 그 많은 학생들을 선생님이 하나하나 케어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엄마가 해야 할 일인 것이지.

그 당시에 나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했을까?

스스로 자책도 하게 된다.     

약간을 철없는 시기에 아이를 낳아서 그게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걸까? 아니면 임신했을 때 내가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걸까? 그도 아니면 시댁 쪽에 누군가 발달장애가 있는 분이 계신가? 원인 모를 원인들을 속으로 분석해 본다.

그러나 그런 분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쓸데없는 생각이다.     

다시 생각을 돌린다. 현재에 집중하기로. 과거는 이미 다 지나가버렸으니.     

많은 경험을 하고 눈이 조금이나마 넓어진 나는 다시금 생각한다.

취학 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조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볼 거라고. 그 당시엔 전업주부라 시간도 충분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기관에 보내면서 아이들도 사회성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말이 일부는 맞을지도 모르겠으나 발달이 느린 아이들이라면 유대감이 있는 엄마가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훈육시키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잘 자란 아이들에게 사회성이란 것은 거저 생기는 거니까.     

기관에 보내면 눈앞에서 보이지 않으니 엄마한테는 편하고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아이가 유치원에서 생활하며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후회로 가득 남는다.     


어찌 됐건 결론은 하나다. 지금 이 순간도 몇 년 뒤엔 다시 과거가 될 터이니, 지금이라도 잘하자! 나만 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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