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만 하나?”
“아니지, 두 번 해야지. 제사 지낼 때 그렇게 하잖아.”
“맞아, 죽은 사람한테 하듯이 두 번 해야지.”
“야, 마지막에 반절도 해야 해.”
우리 중학교 뒷산은 소나무 숲이었다. 그 나무들 사이에 작은 무덤을 하나 만들어 놓고 우리 셋은 진지하게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무덤에는 개구리 한 마리가 묻혀 있었다. 조금 전 과학 수업 시간에 우리 셋이 함께 해부한 개구리였다. 나는 그날의 해부 실험 내용이나 느낌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30년이 지났는데도 개구리를 묻어 주고 절을 하던 장면은 또렷하게 떠오른다. 피식 웃음이 나다가도 우리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개구리를 좋아했나. 아니다. 나는 어린 시절 개구리를 무서워했다.
모가 자라서 빽빽해지는 초여름부터 아버지는 논에 더 자주 가셨다. 나는 학교에서 제일 일찍 돌아오는 막내였으므로 논으로 심부름 가는 일이 잦았다. (내가 크기 전에는 오빠 언니가 했겠지) 보통은 설탕을 탄 시원한 얼음물을 주전자째 들고 가는 심부름이었다. 집에서 논까지는 10분도 채 안 걸리는 길이니 고되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다만 내가 무서워하는 것이 그 길에 있었는데, 바로 개구리였다.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를 상상하면 안 된다. 논 근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참개구리는 덩치도 꽤 크고 (내가 보기엔) 귀엽지도 않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농촌 마을이다 보니 나에게 동물이나 식물은 ‘자연’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냥 ‘생활’ 그 자체였다. 딱히 무서워하는 것도 꺼리는 것도 없었다. 예를 들어 낡은 시골집이라 쥐도 흔했다. 지금 집에서 쥐를 본다면 까무러치게 놀라겠지만, 그때는 쥐를 봐도 덤덤했다. 뱀을 만난 적도 여러 번 있는데 ‘내가 뛰면 너보다는 빠르겠지’라는 마음이 들어서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개구리를 좀 무서워했다. 그 이유가 지금도 생각나는데, 그 녀석의 예측 불가능한 점프 때문이었다. 언제 개구리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논으로 가면서 항상 긴장했었다. 다른 곳보다 논 근처에는 개구리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정작 그런 경험은 없었지만, 그 녀석들이 난데없이 뛰어올라 옷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면 그 축축한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서 풀숲을 유심히 살피면서도 최대한 빠르게 논길을 걸어가곤 했다.
그런데 중학교 과학 시간에 개구리 해부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닌가. 뛰어오르지 않는 개구리는 더 이상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실험대에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결국 우리가, 내가 개구리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죽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날의 다른 기억이나 느낌은 하나도 안 남아 있고 개구리를 묻어주던 장면만 생각나는 게 아닐까.
시간이 흘러 나는 교사가 되었다. 그동안 동물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도 다양해지고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개구리 해부 실험은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빠진 건 2009년이지만, 학원이나 학교의 특별 활동 명목으로 개구리 해부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인터넷에 개구리 해부를 검색해보면 최근 사진과 활동 내용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게 중단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미성년자의 동물 해부 교육이 원칙적으로 금지된 것이다. 다만 학교에서 필요한 경우 학교운영위원회와 동물실험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 동물 해부 실험이 가능하도록 예외 조항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 학교에서도 과학 동아리 학생들이 몇 년 전까지 개구리 해부를 해 왔다. 나는 아직도 학생들이 개구리 해부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척 놀라고 불편했다.
중학교 때는 몰랐던 나의 감정에 지금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단지 흔하다는 이유로 전국의 모든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수십 년 동안 살아 있는 개구리를 해부한 것은 전혀 교육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참개구리든 황소개구리든 중요하지 않다. 생명을 해치면서 배우는 것은 가치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에게는 과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는지 몰라도 나와 우리 조 친구들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결국 우리가 죽이고 우리가 묻어주며 그 죄책감을 달래려 한 것이 아닌가. 죄책감은 달래지지 않았고 30년이 지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다.
5월 모내기를 앞두고 논에 물을 채우면 개구리 울음소리도 가득 차게 된다. 수십 년의 해부 실험을 버텨 온 그들은 여전히 우렁차게 짝짓기를 준비하고 있다. 모내기를 돕는다고 고향에 내려가면 들리는 건 온통 개구리 소리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매년 핸드폰으로 녹음하기도 한다. 개구리가 너무 많다고 투덜대며, 축축한 질감을 무작정 두려워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조금 민망하다. 여전히 내 발등으로 개구리가 튀어 오르면 소리를 지를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울음소리를 응원한다. 여전히 내가 좀 안 좋아하지만, 그들이 버티고 버텨서 풀숲과 습지에 여전히 존재해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