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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띠 Jul 23. 2020

시베리아, 지금 이 길의 끝에서

러시아 여행이 내게 말해준 것


일상을 떠나 낯선 곳으로 한발짝.    

 

때때로 나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도 없는, 나 하나를 오롯이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곳으로 말이다. 일상의 무게가 버겁게 나를 짓누르고 내뱉는 숨이 무겁게 느껴질  때, 내 마음속에도 유난히 강한 바람이 인다. 지난 일 년이 그랬다. 내 머릿속에는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이 엉켜있는 실타래로 가득 차 있었다. 풀어보려 하면 할수록 나를 더 강하게 옭아매는 듯했다. 지금의 나에겐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 애쓰기보다, 잘 풀릴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실을 느슨하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음에도 여유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게 작년, 러시아로 떠나는 이유였다.  


 블라디보스토크공항의 새벽



        

광활함 속 우린 그저 작은 존재일 뿐.


러시아는 참 광활했다. 세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나라이면서 그만큼 황량했다. 그 광활함을 두 번 느꼈었는데, 첫 번째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로 가기 위해 3일간 기차에서 시간을 보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역을 정차할 때를 제외하고 거의 똑같은 풍경이었다. 광활한 대지에 우거진 수풀 혹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였다. 해가 뜨는 새벽에도 달이 뜨는 저녁에도 하늘의 빛깔만이 다를 뿐이었다. 휴대폰이 잘 터지지 않아 시간 감각 없이 그저 빛이 들면 눈을 뜨고, 뱃고동이 울리면 밥을 먹으며, 어둠이 찾아들면 잠을 청하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갔다. 끝없이 펼쳐진 시간과 공간 속에 놓여있는 ‘나’라는 존재는 세상 속 한낱 점도 되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겸손해졌다.  


끝없이 넓게 펼쳐진 황량한 러시아의 대지


두 번째는 바이칼 호수를 보러 가기 위해 알혼 섬으로 들어가는 길에서였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하루를 보내고, 알혼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아침 일찍 버스에 올랐다. 시내에서 출발해 버스를 타고 4시간가량을 무서우리만치 끝없이 펼쳐진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내 눈 앞에는 그저 땅과 하늘만 있을 뿐 넓은 시야를 가리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하염없이 달리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끝을 모르고 펼쳐진 길 위의 아주 작은 존재인 나는 얼마나 사소한 것에 얽매이고 속박되어 사는지 말이다. 끝없이 달리는 동안, 내가 안고 사는 고민들은 그 어떤 힘도 쓸 수 없었다. 내 고민의 무거움은 알을 깨고 넓은 들판 위로 자유로이 날아갔다. 그리고 끝을 모르게 펼쳐진 뻥 뚫린 도로를 달리면서 내 몸도 마음도 시원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배를 타고 10분, 또다시 차를 타고 한 시간 황야를 달려 후지르 마을에 도착했다. 무한대로 펼쳐진 자연의 시간은 나를 고요하고 잠잠하게 만들었다.           


4시간을 달리고서야 도착한 후지르 마을




저문다는 것은 또 다른 시작임을.


내 인생에서 가장 또렷한 일몰을 본 것은 이번 여행이 처음이었다. 바이칼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샤먼 바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일몰을 보기 위해서였다. 쌀쌀한 날씨에 감기에 걸릴지언정 이 곳에서는 꼭 일몰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가장 또렷한 일몰을 보았다. 눈이 시리게 푸르고 잔잔한 호수 위에 산수화처럼 그려진 산, 그리고 그 아래로 점차 숨어 들어가는 붉은 해를 보며 일순 생각에 잠겼다.


바이칼 호수에서 바라본 일몰


사람들은 각자의 때에 찬란히 빛난다.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면 언젠가는 진다. 마치 해처럼 말이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은 해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안다, 내일 또다시 이 해가 뜬다는 것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출 혹은 일몰이라는 잊을 수 없는 광경을 선물해 준다는 것을.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준비라는 것을.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오늘 해가 졌다고 내일 해가 뜨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찬란하게 아름다운 장면은 매 순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저 이 순간이 마지막인 듯 소중하게, 그리고 내일의 기대감으로, 매 순간을 의연하고 가치 있게 보내면 되지 않을까. 바이칼 호수에서의 지는 태양은 나에게 잊지 못할 깨달음을 주었다.          




기억은 잊혀도 혀끝은 오히려 선명한 것을.     


맛있는 식당만을 찾아다녔던 걸까, 아니면 러시아 음식이 맛있는 걸까. 다른 사람들은 러시아 음식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데 어째 나는 9일 동안 러시아에서 먹은 음식들 중 맛이 없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세 가지를 꼽으라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먹었던 조지아 음식과 곰새우 라면, 그리고 이르쿠츠크에서 먹었던 까르보나라였다. 조지아 음식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지역 음식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맛의 고장 ‘전주 한정식’ 같은 느낌이다. 러시아에 도착해 가장 처음 먹은 음식이기도 했고, ‘맛있는 녀석들’ 애청자이기도 한 나는 블라디보스토크 편에 나와 꼭 먹어보고 싶은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치즈로 만든 하차푸리, 조지아식 만두 힌깔리, 러시아식 꼬치구이 샤슬릭까지 너무 맛있어 배가 터지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저녁에 배달로 시켜먹은 곰새우는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다. 해양 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곰새우가 특산물이다. 한국에서 사간 봉지 라면에 넣어 먹는 곰새우의 맛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먹은 조지아식 음식들


 그리고 이르쿠츠크에서 먹은 음식도 맛있었는데, 그중 여행 마지막 날 맛보았던 까르보나라는 내 인생 최고의 파스타였다. 우리가 한국에서 먹었던 까르보나라와는 조금 달랐다. 정통 까르보나라는 크림이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간만 맞춰 치즈와 계란 노른자가 올라간다. 연신 ‘진짜 맛있다’라는 말을 남기며 정신없이 흡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 레스토랑은 극동지역에서 최고의 파스타 집으로 꼽히는 트립어드바이저 1위에 오른 곳이다. 셰프가 유럽 전 지역을 돌며 맛보고 배운 것을 기반으로 차린 음식점이라고 했다. 귀국 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도 드는 생각은 오직 그 까르보나라를 한 접시 더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사실 러시아 음식은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고 잘 알려지지도 않아 별 기대 없이 갔었지만, 음식을 먹고 난 후에는 러시아의 맛을 잊을 수 없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러시아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갔지만 그 맛은 아직도 너무 선명하다. 기억은 흐릿해져도 내 미각은 오히려 선명해져만 간다.     


내 인생 최고의 까르보나라 파스타




러시아에서 만난 사람들, 스바시바!   

 

 우리가 러시아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은 주로 부정의 것이다. '인종차별이 심하다, 불친절하다'가 그것인데, 이번 여행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9일 간 내가 만난 러시아 사람들은 밝고 친절했다. 숙소에서 일하는 직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다. 의사소통은 잘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친절했고, 어떻게든 도와주려 노력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만난 러시아인들이다. 첫날 역에 도착했을 때, 이 열차가 이르쿠츠크행이 맞는지 혹시 아니라면, 3일을 날려버리면 어쩌지, 라는 초조함 속에 있었다. 플랫폼에서 함께 기다리는 40대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뭐라 말씀하시는지는 알 수 없어도 손짓 발짓, 각종 표정을 섞어가며 내 질문에 매우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우리는 3일간, 그 아저씨는 2일간 횡단 열차를 탔었는데, 중간중간 정차 구간 매점에서 우리가 물건을 잘 살 수 있도록 알려주기도 하며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있다.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만나 1박2일을 함께한 소년


 그리고 또 인상에 남는 것은 우리 열차 칸에 탔던 모녀였다. 우리는 2등석 4인 칸이었는데, 첫날 저녁에 파란 눈을 한 예쁜 소녀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우리 칸에 머물게 되었다. 어찌나 눈동자가 맑고 깊은지 가만히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 속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눈동자에 푸른 바이칼 호수를 눈에 담고 있는 듯했다. 그 소녀는 나를 볼 때마다 입꼬리를 활짝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그 소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도 슬며시 미소 지었다.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전해진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걸 두고 얘기하는 게 아닐까. 내가 잠이 든 사이에 그 소녀는 먼저 내려 인사를 제대로 나눌 수 없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 예쁜 소녀를 잊을 수 없다. 내가 9일 동안 만난 많은 러시아인들은 참 밝고 친절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기대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는 이 길의 끝에서.

 

 작년에 다녀온 러시아에서 8박 9일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흐릿해졌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니 내가 거길 다녀왔는지 조차 희미하다. 그러나 나는 그 러시아에서의 9일 간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자유로웠고, 또 행복했다.


깊고 넓은 바이칼호수


여행의 순간은 지친 일상에 주는 선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여행 후에 우리는 또다시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러시아에서 무엇 하나 허투루 놓치고 싶지 않아 똑같은 장면을 마음에 무수히 담았던 것처럼, 내 삶의 일상도 여행처럼 바라보면 어떨까.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 그 자체가 곧 여행이라고 한다. 일상을 떠남으로 우리가 받는 선물은 그 자체로도 귀중하고 가치 있다. 그리고 여행 이후 앞으로 우리가 살아 내야 할 일상 또한 내 인생의 여행이라는 선물이다. 그 당시 흐릿한 기억도 시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처럼, 오늘의 이 시간과 하루를 기대하며 소중히 살아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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