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욥기 묵상

욥기 22장

자네 죄악이 끝이 없는 것 아닌가? _욥22:5

by 제이프릭

1 그때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꾸했습니다. 2 "사람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겠는가? 아무리 지혜롭다고 해도 하나님께 도움이 되겠는가? 3 자네가 의롭다는 게 전능하신 분께 어떤 기쁨이 되겠는가? 자네 행위가 흠 없었다고 해서 그분이 무엇을 얻겠는가? 4 자네가 그분을 경외했기 때문에 그분이 꾸짖으셨단 말인가? 그래서 자네를 심판하신다는 건가? 5 자네 악함이 큰 것 아닌가? 자네 죄악이 끝이 없는 것 아닌가? 6 자네는 이유 없이 형제에게 담보를 요구했고 사람들의 옷을 벗겨 버렸네. 7 또 자네는 지친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고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주지 않았네. 8 권세 있는 사람이 땅을 얻었고 존귀한 사람이 거기 살았네. 9 또 자네는 과부를 빈손으로 보냈고 고아들의 팔을 꺾어 버렸네. 10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올가미가 자네를 둘러싸고 있고 갑작스러운 공포가 덮치는 것이네. 11 아니, 너무 어두워 자네가 앞을 볼 수 없고 홍수가 자네를 덮고 있는 것이네. 12 하나님께서 하늘 높은 곳에 계시지 않은가? 높은 곳에 있는 별들이 얼마나 높은지 좀 보게! 13 그런데 자네는 '하나님이 어떻게 아시겠나? 그분이 이런 먹구름을 뚫고 심판하시겠나? 14 빽빽한 구름이 그분을 가려 보실 수 없고 하늘을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우리를 보지 못하신다'고 하니 15 악인이 밟은 전철을 자네가 밟으려는 것인가? 16 그들은 때가 되기 전에 끊어졌고 그 기초가 홍수에 쓸려가 버렸네. 17 그들이 하나님께 '우리를 떠나 주십시오' 라고 했고 '전능하신 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네. 18 하지만 그분은 그 집들을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셨네. 그러나 악인의 계획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네. 19 의인들은 보고 즐거워하고 죄 없는 사람은 그들을 보고 웃는다네. 20 '우리가 가진 것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재물은 불이 삼켜 버렸다'고 할 것이라네. 21 자네는 그분과 화해하고 맘을 편히 하게. 그러면 자네에게 좋은 일이 올 것이네. 22 부탁하는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자네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 두게. 23 자네가 전능하신 분께 돌아가고 죄악을 자네 장막에서 치우면 다시 회복될 걸세. 24 황금을 티끌 위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시내의 자갈들 위에 버리게. 25 그리하면 전능하신 분이 자네 보물이 되고 자네에게 귀한 은이 될 것이네. 26 그러면 자네는 전능하신 분 안에서 기쁨을 찾게 되고 자네 얼굴을 하나님께로 들게 될 걸세. 27 자네가 그분께 기도할 것이고 그분이 자네 말을 들으실 걸세. 그리고 자네는 그 서원한 것을 지키게 될 걸세. 28 또한 마음먹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고 자네의 길에 빛이 비칠 걸세. 29 사람이 낮추어질 때 네가 높여지게 되리라고 하지 않는가? 그분은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네. 30 그분은 죄 없는 사람을 풀어 주시니 자네 손이 깨끗하다면 풀려날 걸세." _욥22:1-30, 우리말성경


연극의 마지막 논쟁 주기(3차)가 시작되며, 조명은 다시 첫 번째 친구 엘리바스에게 향한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연륜이나 확신 대신, 논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자의 초조함과 독선이 묻어난다. 그는 욥이 제기한 '악인의 형통'이라는 현실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이전에는 없었던 구체적이고 악의적인 죄목들(과부를 학대하고 고아를 억압했다는 등)을 만들어내 욥을 직접적으로 고발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논쟁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을 보여준다. 엘리바스는 이제 '비방과 날조'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다. 자신의 신학적 세계관이 현실의 증거 앞에 흔들리자, 그는 그 현실을 부정하고 상대를 악마화하는 길을 택한다. 이로써 대화는 완전히 파탄에 이르고, 친구들의 위로는 이제 욥의 인격을 파괴하려는 명백한 공격이 된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회개와 회복의 제안(21-30절)은 위선적인 울림으로 공허하게 퍼져나갈 뿐이다.




자네 악함이 큰 것 아닌가? 자네 죄악이 끝이 없는 것 아닌가? _욥22:5


엘리바스는 지금 할 말이 궁하다.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핍박받는 세상의 현실에 대한 욥의 질문에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그래, 너 잘났다. 근데 그렇게 잘난 네가 지금 이러고 있는게 그러면 하나님 탓이냐?' 는 식의 유치한 공격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래도 네가 악한 죄를 저질렀으니 지금 그러는 것 아닌가?' 하면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더구나 근거도 없는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 '아마 네가 그랬으니까 그러시는 것 아니겠나? 그런 짓 저질렀지? 내 말이 맞지?' 하는 것이다.


하나님 면전은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짓지도 않은 죄를 쥐어 짜내어 어쨌든 굴복하게 하시려는 분이 아니다. 순종과 엎드림은 우리가 영문도 모른채 모든 것을 그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도 되지 않으면서 의로움을 찾는 것이 아니다. 사실 맹목은 순전한 복종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 이득을 취하려는 다른 목적으로 인한 행동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하면 좋은 것을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엇에나 고개를 숙일 때가 많다. 흔히 돈에 그렇고 권력에 그렇다. 그것은 실제하는 대상이기도 하고 우리 마음 속에 이상향으로 품고 있는 무엇인가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엘리바스의 이해 속에서 하나님은 굴종하는 백성에게 형통함의 떡고물이나 가끔 던져주는 분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항 속의 물고기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어진 상황의 부조리와 의문에 대해 더욱 고민하고 치열하게 싸우고 그분의 더 깊은 뜻을 헤아리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리를 더 알아내고 우리도 그분의 일하심에 동참하길 원하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그분과 교제할 동반자로 삼으셨다. 만물의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화하고 교제하기 위한 수준에 도달하는 일은 신자가 일생을 두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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