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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 May 15. 2020

영국 워홀 1년간의 기록

그동안 뭘 하고 놀았는가

    무작정 회사를 박차고 나와 서울의 삶을 죄다 정리하고 비행기 맨 뒷자리에서 엉엉 울며 한국을 떠나온지도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각오했던 것보단 큰 사고 없이 잘 흘러오긴 했지만 한편으론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는 것들도 있었기에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임을 실감한다. 처음 런던에 왔을 땐 최대한 나의 경험을 많이 기록해놓으려 했는데, 막상 일을 일찍 시작하게 되어 이곳 생활에 금방 익숙해지고 나니 굳이 기록할만한 특별한 에피소드들도 없는 것 같았고 시험 삼아 찍어본 브이로그는 내가 보기에도 너무 노잼이라 그냥 때려치고 말았다^_ㅠ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이 휘발되어 모든 걸 까먹기 전에 1년 동안 뭘 하고 살았나 기록용으로 남겨보도록 한다.


브라이튼 당일치기 여행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너어무 많이 불어 너무너무 추웠던 세븐시스터즈..

    런던에 오자마자 할 일 들이 대강 정리되고 나면 브라이튼에 가고 싶었다. 여러 명이 같이 기차표를 예매하면 할인이 되어서 유랑으로 동행을 구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다들 퇴사한 직장인이거나 연차 낸 직장인들이어서 재밌는 조합으로 하루 종일 즐겁게 여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관광객 같은 마음으로 런던을 돌아다닐 때여서 마냥 신났었다 ㅋㅋ


베를린 여행

우연히 지나가다 메르켈을 마주쳤던 국회의사당

    최종 오퍼를 받고 입사 전까지 약 3주간의 자유시간이 있었는데, 런던에만 있기 아깝다는 생각에 4박 5일 베를린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의 홍대라느니 힙스터들의 성지라느니 하도 핫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어떤가 싶어서 가본 건데 역대급으로 제일 심심했던 여행지였다. 유럽의 웬만한 도시는 이미 다 다녀와봐서 유럽에 대한 로망도 별로 없었고 레스토랑이든 관광지든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너무 불친절해서 그냥 하루빨리 다시 런던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맥주만 퍼마시다 왔다..ㅋㅋ 그래도 자전거 투어로 구석구석 돌아보았던 분단 독일 시절의 아픈 상처들과 어쩌다 길을 지나다 마주쳤던 간소한 메르켈 총리의 의전만은 기억에 남아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여행

이때만 해도 서로 어색하던 시절..ㅋㅋ

    여기 오자마자 운 좋게 만나게 된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함께 떠났던 여행이었다. 런던에서 기차로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아름다운 호수들과 잉글랜드에서 보기 드문 수려한 산 풍경을 볼 수 있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 중 하나이다. 윈더미어 마을을 중심으로 다양한 하이킹 코스들을 즐길 수 있는데, 우리는 현지 가이드와 함께하는 한나절짜리 하이킹 투어를 했었다. 풍경도 정말 예쁘고 코스 난이도도 적당했고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언젠가 한번 또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BBC Prom

아직도 마냥 앳된 소년 조성진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거장이 되어가고 있다.

    런던에서 프롬을 직접 보는 게 평생소원이었는데 작년에 그 소원을 정말 원 없이 이뤘다. 프롬 첫 공연부터 시작해서 무려 한 시즌에 다섯 번이나 프롬을 보러갔다..ㅋㅋ 그중 단연 가장 좋았던 공연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조성진이 협연한 프로코피예프 피협 2번을 꼽겠다. 하마마츠 콩쿠르에서 우승할 때부터 응원하던 꼬맹이 피아니스트가 무려 쇼팽 콩쿠르를 씹어먹고 로얄알버트홀을 꽉 채운 청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고 있는 걸 보자니 마치 내 아들이 잘 커준 것처럼 뿌듯했다. 사실 프롬의 하이라이트는 Last night of the Prom인데, 대놓고 국뽕에 차는걸 극혐하는 영국인들이 드물게 국뽕을 마음껏 드러내는 날이기도 하다. 프롬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로얄알버트홀과 주요 도시의 공원에 모여서 한 시즌을 마무리한다. 콘서트의 마지막에 모두가 함께 국가를 떼창하며 다음 해의 프롬을 기약하는 모습은 꽤 감동적이었다. 과연 올해는 프롬을 볼 수 있을까..?ㅠㅠ

유쾌하면서도 감동적이었던 프롬의 마지막날


크리스마스 홀리데이

남자친구 아버님이 요리해주신 크리스마스 디너. 처음 먹어본 칠면조였는데 넘 맛있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란 커플들을 위한 전유물이지만, 영국에서의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가장 큰 휴일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작년 크리스마스엔 감사하게도 남자친구 가족들의 초대를 받아서 처음 영국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를 따뜻하게 보냈다. 평생을 큰집 딸로서 매년 명절마다 전쟁을 치러왔던 나는 서로 준비해온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나눠먹으면서 크리스마스 크래커에서 튀어나온 실없는 농담들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이 너무 생경해서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문화충격을 느꼈다.


바스여행

대충_내가_여기서_졸업식_했다는_뜻.jpg

    7주 동안 주 7일 매일 일했던 지옥 같은 윈터원더랜드 팝업스토어 운영기간을 무사히 끝내고 바스로 휴가를 다녀왔다. 로마시대 유적이 남아있어 도시 느낌이 독특하고 기차를 타면 런던에서도 금방 갈 수 있어서 당일치기 여행지로 인기 있는 곳인데, 가는 김에 여유 있게 스파도 즐기고 싶어서 2박 3일 주말여행으로 다녀왔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여행 컨셉이라 호텔에 틀어박혀 늘어지게 자고 심심하면 스파 가서 사우나하는 게 팔 할이었지만 로만바스 박물관도 보고 남자친구 인생 암흑기 박사 시절의 발자취..ㅋㅋ도 알차게 돌아보고 왔다. 


    근 한 달간 집에만 갇혀있다 보니 쓸데없는 잡생각이 늘면서 지난 1년 동안 왜 더 많은 걸 이루지 못했나 자책감이 들곤 했다. 하지만 막상 한 해를 돌아보니 다른 워홀러들의 무용담처럼 재미있게 늘어놓을 고난역경 어드벤처는 없었어도 소소한 행복으로 채워온 일상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당분간 코로나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런던의 모습들을 100% 누릴 수 없어 슬프지만 1년의 기점을 무사히 넘었으니 워홀 오기 전 세워둔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해 차분히 준비하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이제 막 몇 가지 시도를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멘탈이 깨지는 느낌이지만ㅠㅠ 1년 전 나 자신이 그랬듯이, 눈앞에 놓인 문제들을 하나씩 풀다 보면 언젠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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