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9-10월

일상 남겨두기

by 은정


1. 함께하는 등굣길.

아이는 어제 3층 교실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두 번 허리를 숙여 내가 학교 후문 앞에 서 있나 확인을 했다. 오늘은 뒤돌아보지 않고 들어갔다. 나는 영원히 아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볼 존재.


2. 아침.

최유리 콘서트 리스트를 들으며 서재에 앉아 달달한 커피를 마시며 무루님의 에세이 <우리가 모르는 낙원>을 읽는 금요일 아침. 남은 내 자유 시간은 세 시간. 책도 읽고 독서노트도 쓰고 블로그 글도 쓰고 밥도 차려 먹고 치워야 하고 씻어야 해. 책을 펼쳐 읽는데 너 다섯 장 읽고 딴짓하다가 너 다섯 장 읽고의 반복이다. 아 오늘은 날이 아닌가. 책을 바꿔볼까? 하다 60여 페이지를 읽고 덮었다.


3. 내 일상의 중심이 내가 아닌 생활이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지쳤다.

작은 것이라도 나만의 루틴,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보려 한다. 일단 오늘은 아이를 등교시키고 바로 커피 한 잔을 사서 도서관에 다녀왔다. 책 제목들만 읽어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 빌린 책은 <비움효과>,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너는 이미 기적이다>, <마음방울채집>.


4. 아이가 잘 먹지 않아서 1킬로 늘 때마다 케이크에 초 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너무 많이 먹는 걸로 고민을 하고 있다. 활동량도 늘이고, 간식도 좀 줄여봐야지.


5.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이 선선하다. 눈을 감고 방금 봤던 하늘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6. 우리 고양이 사라는 경증-중증의 천식이 있어 흡입기 사용을 하는데 거기에 사용하는 약품 회사가 한국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아도 공통되는 약물이 들어간 제품이 있지만 고양이 임상실험을 하지 않은 거라 안전성에 우려가 있다고 한다. 흡입기가 아닌 네뷸라이저로 할 수 있는,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약물이 있어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차선책이 될 것 같다. 흡입기는 15초 정도면 되는데 네뷸라이저는 5분은 하고 있어야 한다. 왜 철수를 했을까 ㅜㅜ 알아보니 올해 연초부터 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너무 늦게 알았다. 어떻게든 구해봐야지.


7. 아이 놀이상담을 다녀왔다.

이번 주 숙제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 때 그걸 말로 표현해 보기. 아이 학교 생활에 관심이 있고 궁금해한다는 걸 표현해 주기. 지금 해두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고착화된다.


8. 이 한 문장을 써야지 하고 노트북을 열었는데 그새 까먹었다. 뭐였을까. 뭐였지.

아이 소변에 거품이 보여서 소변 검사를 해보려 한다. 학교 전화 상담을 신청했고 다음 주 목요일에 하는 것으로 담임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9. 내일은 다시 꺼내기 힘든 말을 꺼내야 하는 날이다.

지금 이 시간들을 몇 년 후에 이럴 때도 있었지 하며 과거만의 일로 얘기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는 건 정말 지랄 맞은 일들 투성이다. 지나면 잊어야지. 잊어버려야지. 기필코 잊고 말아야지.


10. 등굣길에 아이가 한 말.

엄마 그거 알아? 하늘을 나는 뱀이 있대. 이 나무에서 저 나무까지 쉬이 잉 날아간대.라고 말하며 반짝이는 눈. 이런 대화가 좋아서 아직은 같이 손잡고 등하교하는 길이 좋다.


11. 갑자기 가을이 왔다.

어리둥절하다 서둘러 가을 옷을 꺼내고 세탁을 위해 한쪽에 쌓아본다. 여태 몇 년 어찌어찌 가을 점퍼 하나 없이 어영부영 보냈는데 올해는 하나 꼭 장만하리라 마음먹고 한참을 고민하다 골라보았다. 매일 부담 없이 트레이닝복 위에도 입을만한 것으로. 내년가을에는 가죽이나 코듀로이 점퍼를 장만해야지 하고 쇼핑 계획 세우는 p.


12. 하기 어려운 말을 미루고 미루다 뱉어낸 날.

지금을 잘 기억해서 앞으로의 삶에 기준을 잡아야지.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이 순간들은 언제 끝이 날까. 아닌가. 나를 작게 보는 건 나 자신이니 그걸 바꿀 수 있는 것도 나뿐인 것 아닌가.


13. 내 서재. 밤. 잠이 안 온다.

내가 지금 가장 힘든 건 무기력함.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해보려 하는 데 너무 어렵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맞나.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인생의 큰 고비를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 또한 끝이 있겠지. 오늘 기억나는 문구는 '나의 구원자는 나 자신이다.'


14. 낮엔 아직 여름이다.

낮잠을 좀 자고 일어났다. 경주 여행을 이모도 함께하게 되었다. 어제 숙소를 더 저렴한 곳으로 바꿀까 고민했는데 안 바꾸길 잘했네. 부산 3박 경주 2박 당장 눈앞의 것들만 보고 느끼다 와야지.


15. 가족들과 밥을 한 끼 같이 먹었다. 마냥 좋기만 한 기쁨은 아니지만 이걸로만 채워지는 충만함이 있다.


16. 우리 고양이 연속 기침에 불안이 올라온다. 두어 달 전의 상황이 겹쳐온다. 아니겠지. 그냥 칼리시 후유증일 거야. 내일 일찍 나가서 다음날 저녁에나 집에 돌아올 텐데…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니까 하루아침에 나빠지진 않을 거다. 아는데도 생각이 계속 나빠질 쪽으로만 향한다. 나쁜 습관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17. 목이 아프다. 온몸에 힘이 없다. 억울하다.

이틀 뒤에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인데. 못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억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이 불안감을 떨쳐버릴 잠깐의 시간이 절실한데.

억울한 마음으로 내일 할 일을 생각해 본다. 늦잠 자고 일어나서 빵 대충 먹고 고양이들 챙기고 주방 정리해 주고 아이 독감 주사 맞히러 병원 갔다 집에 와서 빨래 한번 돌리고 아이 구몬 시험 봐주고 점심 먹고 정리하고 저녁 준비 전까지 널브러져 쉬어야지. 이제 자야 할 것 같은데 잠들기 아깝다. 따스운 옥수수차 한 잔을 내려두었으니 이거 다 마시면 자야지.


18. 세 달 만에 사라 치아를 살펴보니 치아흡수병변이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환절기가 지나는 대로 발치를 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체중이 변하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잘 먹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통증이 엄청 크지는 않은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매일 유산균영양제와 오라틴겔 발라주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치아사진 남겨두고 침 흘리거나 아파하지 않는지 살펴보기. 기침은 어떤지 숨소리는 어떤지 보기. 천식 관리 잘하고 통증 관리 잘해서 12월 초중순쯤 좋은 컨디션으로 발치 잘하는 게 목표. 천식 때문에 마취가 너무 불안하지만 이건 발치를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아 이런 생각들을 쭉 하고 있으니 또 불안이 고개를 들이민다. 이렇게 급격하게 진행이 되는 건 세 달 전 칼리시 바이러스가 휩쓸고 가서 그런 것이고 그 망할 바이러스가 시작된 건 내가 고양이들에게 소홀한 상황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 것 같다는 죄책감.


19. 나는 아무래도 책임을 과하게 지려고 하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상황이 불안한 상황이라 그런 것일까? 내가 모든 걸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흘러가는 게 불편해서 이러는 걸까? 아니야. 이건 통제의 영역이라기보다 책임의 영역이다. 왜 모든 걸 내 탓으로 받아들이게 될까? 왜 모든 것이 불안의 신호가 될까. 불안이 너무 커지면 다른 모든 감정은 사라지고 불안만 남는다. 어떡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네,라고만 생각하게 된다. 불안과 사랑이 공존해도 괜찮다고, 모든 걸 잡아먹게 내버려 두지 말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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