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을 바쳐 조국을 지키다
185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이상룡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익히며 학문과 예절을 중시하였고, 조선 말기 과거에 급제한 뒤 대한제국 시기에는 중추원 찬의, 학부협판 등을 지내며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는 유림 사회의 대표 인물 중 한 사람이었고,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지식인의 책임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이상룡은 더 이상 관직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고향으로 내려와 관직과 모든 사회적 역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가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나라가 없어졌는데, 내가 관직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한 말은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실천의 결심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의 다음 선택은 단호하고 결연하였습니다. 1911년, 그는 가족 50여 명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주에 앞서 그는 고택, 논밭, 서책, 고문서까지 모두 정리하고 떠났습니다. 이는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길을 선택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상룡에게 독립운동은 하나의 명분이 아니라, 삶 전체를 던지는 일이었습니다.
이상룡이 이주한 만주 서간도 지역 삼원보는 당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모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곧바로 '경학사'를 조직하여 자치 조직과 교육 사업을 동시에 추진하였습니다. 경학사는 단지 유학 교육 기관이 아니라, 항일 의식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운영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실천 조직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안동 출신 유림들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이를 1912년 무관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로 확대하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단순한 군사훈련 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적 준비를 담당하는 핵심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등 훗날 독립군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이상룡은 단지 교장으로서 행정만을 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과 과정을 직접 살피고, 자금을 마련하고, 교육생들의 생활까지 책임졌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교사, 행정요원, 후원자로 함께 참여하였고, 삼원보 지역 전체가 사실상 하나의 독립운동 공동체로 움직였습니다. 독립운동은 이상룡 개인의 결단에서 출발했지만, 곧 가문 전체의 실천으로 확장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해외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에 모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상룡은 서간도 지역의 대표로 참여하였고, 192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령에 선출되었습니다. 국무령은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행정부 수반의 역할을 맡는 자리였습니다.
당시 임시정부는 초기의 열기와 달리 재정난과 내부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상룡은 유학자다운 원칙과 중용의 태도로 각 세력 간의 조정을 시도하였고, 임정의 명분과 조직을 유지하는 데 헌신하였습니다. 특히 무장 독립운동 강화를 위한 ‘통군부’ 결성에 참여하여, 흩어진 독립군 세력을 하나로 모으는 데도 기여하였습니다.
그의 활동은 외부의 탄압뿐 아니라 내부의 분열과 싸우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념이나 정파보다 ‘독립’이라는 대의를 앞세우며 정부 운영의 안정에 주력하였습니다. 이상룡은 1932년까지 만주와 중국을 오가며 임정 활동과 독립군 지원에 힘썼지만,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룡의 독립운동은 철저히 공익을 위한 선택이었으며, 그 실천은 가족 전체로 확장되었습니다. 그의 양자 이탁, 손자 이강, 사위 이중업 등은 모두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무장투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광복 이후에도 교육자, 사회운동가로서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한 가문 전체가 조국을 위해 삶을 내던진 사례는 매우 드물며, 그 상징성은 깊고 묵직합니다.
그의 외손자인 박찬대 국회의원은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 정신이 단절되지 않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상룡이 선택한 삶의 방향이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독립운동이 단지 과거의 투쟁이 아니라 현재와 연결된 가치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공익과 사익의 갈림길에서 그는 단호히 공익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삶 전체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증명하였습니다. 이상룡의 삶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삶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