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형제, 전 재산을 던지다
이회영은 186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이유승은 흥선대원군 치하에서 우의정을 지낸 인물로, 집안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였습니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유학을 익히고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지만, 이회영은 점차 성리학적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적 개혁과 민권 사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는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 등 개화운동 참여로 이어졌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민족의 위기를 절감하던 그는,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해 그는 부친의 장례를 치른 후 벼슬을 완전히 단념하였고, 가문 사람들과 함께 실력양성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무렵부터 그는 현실 정치보다 교육과 군사훈련을 통한 독립운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특히 1910년 한일병합이 단행되자 그는 여섯 형제와 논의 끝에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피난이 아닌, 체계적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목표로 한 이주였고, 그 시작에는 철저한 자기부정과 결단이 있었습니다. 당시 처분한 재산은 한성 일대의 땅 8만 평과 한양 도심의 가옥 등으로, 한화로 수천억 원에 달하는 가치였습니다.
1910년 말, 이회영과 가족은 만주의 서간도 지역 삼원보에 정착하였습니다. 이곳은 이미 적지 않은 조선인 유민이 정착해 있었지만, 정치 조직이나 교육 기관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이 지역에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자치 공동체를 세우고자 하였고, 그 첫 성과가 ‘경학사’의 창립이었습니다. 경학사는 단순한 유학교육 기관이 아니라, 서간도 전체의 민족교육과 자치, 치안까지 담당하는 종합적 조직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1911년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으며, 이 학교는 1912년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됩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명실상부한 독립군 양성소로, 1920년대까지 약 3,500명의 청년을 배출하였습니다.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등 수많은 무장 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이회영은 운영뿐 아니라 교육과 재정, 무기 조달까지 직접 책임지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는 무장 투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민족교육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군사력 양성을 통해 일제의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의 활동은 민족주의·개화주의 계열 인사들과 무장 독립군 계열 간의 가교 역할을 하였고, 실천적 행동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더욱 분명히 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각지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이회영도 그들과 합류하였습니다. 그는 초기 임정의 재정과 조직 안정에 기여하였고, 안창호·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두고 활발한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임정 내부의 갈등과 무장노선의 한계에 실망한 그는 점차 아나키즘(무정부주의)적 사상과 연대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회영은 1920년대 후반부터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하며, 신채호, 유자명 등과 함께 폭력 혁명과 민중 주도의 국가 재건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는 무정부주의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독립 이후 조선 사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여러 청년 조직과 잡지를 통해 민족 해방 이후의 사회상을 제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요시찰 인물 명단에 오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32년 북경에서 일제의 밀정에 의해 체포된 그는, 일본 헌병대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사망 당시 가족에게 시신조차 인도되지 않았고, 그의 죽음은 장기간 국내에서 조명되지 못한 채 역사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이회영의 삶은 현재보다는 먼 미래의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삶의 터전을 스스로 버렸으며, 재산을 독립운동의 기반으로 바쳤습니다. 교육기관을 세우고 청년들을 훈련시켜 내보냈으며, 군사조직과 해외 연대를 통해 독립운동의 방향을 실천 속에서 구체화하였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유교적 충절이나 단순한 분노의 감정이 아닌, 철저한 실천과 계획 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의 동생 이시영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냈지만, 가족 대부분은 광복 이전에 순국하거나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회영의 이름은 ‘잊힌 독립운동가’로 남아 있었지만, 1990년대 이후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에서 그의 실천적 민족주의와 가족 전체의 헌신이 재조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최근에는 독립운동의 대가를 국가로부터 보상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가장 순수한 실천가’라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공익과 사익의 경계 위에 서 있습니다. 이회영은 그 경계에서 단호히 공익을 택한 사람입니다. 후손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그는 재산이나 명예보다 중요한 유산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행동하는 양심, 실천하는 공동체 구성원이란 무엇인가를 삶 전체로 보여준 인물, 그가 바로 이회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