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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리스본에서 둘째 날

by Jason

리스본에서 둘째 날


지난밤 리스본에서의 첫날밤이었는데 거의 잠을 못 자고 뜬 눈으로 새웠다.

첫째는 우선 너무 더운 날씨였는데 에어컨이 없었고, 그것보다 더 큰 일은 우리가 있는 이 방이 전형적인 서향 방이었다.


옛날에 아버지는 나한테 항상 하시는 말씀이 절대 서향집을 사면 안 되다는 것이었다. 돈이 비싸더라도 반드시 남향집을 사야 한다. 정 어쩔 수가 없으면 동향집이나 심지어는 북향집을 사더라도 서향집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하셨다. 특히 여름에 서향집에서 지내기가 힘들다고 하셨는데, 평생을 서향집에서 살아보지 못한 나는 드디어 이 먼 리스본에서 그 체험을 하게 되었다.


오후 내내 지는 해에 달구어진 방은 그야말로 찜통이었고, 이 열기는 밤새 훌륭하게(?) 유지되었다. 가뜩이나 바뀌어진 잠자리에 예민한 나는 이런 환경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에 연일 신기록을 경신하여 나가는 리스본의 더위는 열대야로 이어져서 잠은커녕 그냥 누워있기도 힘들었다.


이럴 경우 먼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들이 알면 또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할 것 같아서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어차피 내일 하루만 더 고생하면 로마로 이동할 것이고 로마에서는 호텔에서 잔다고 하니 그것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면서 이런 고생보다는 아들과의 이번 여행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니 이 고통도 금방 극복할 수 있었다. 인생 모든 일이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다. 특히 이번 여행은 이런 점에서 나를 많이 성숙시켜 주었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같다.


아들도 9시경 기상했는데 영 활기 있어 보이지 않았고 지쳐 있었다. 스페인에서 잘 다니다가 세비야에서 더위에 한방 맞고는 그날 밤 버스로 이동하는 바람에 몸의 컨디션이 회복되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리스본의 또 사상 최고의 더위까지 겹쳤으니 신체 리듬은 영 헤어나질 못하였다.


집주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와서는 지난밤에 더워서 힘들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것을 보니, 서향 방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들이 집주인에게 세탁 여부를 물어보았는데 원하는 아무 때나 사용해도 좋다고 하고 아들은 오늘 저녁에 세탁하겠다고 집주인과 이야기를 마쳤다. 그 후에도 방에서 더 쉬다가 11시경 집을 나왔다.


어제 브런치를 먹었던 집이 불친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카드를 안 받기 때문에 아들이 광장에 있는 맥도널드에 가자고 했다. 프랜차이즈 점은 무조건 카드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고, 피구에이라 광장에 있는 맥도널드에 갔는데 뜻밖에도 카드가 안 된다고 한다.

둘이서 빅맥 세트를 먹었는데 금액은 10유로 밖에 안 했지만 현금이 나갈 때마다 불안해졌다. 7월 20일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아내가 join 하기로 했다. 그때 현금을 가져오라고 이야기했지만 지금 같아서는 그때까지 현금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들은 혹시 몰라서 한국에서 출국할 때 해외에서 현금 인출이 가능한 카드를 발급받았다고 하면서 이탈리아부터는 해외 현금 인출이 가능한 ATM 기계를 찾아보자고 하였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둘러보기로 하였다. 먼저 어제 호시우 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양 옆의 바이샤 지구와 바이루 알뚜 지역을 모두 보고 떼주강을 만나는 남단 끝의 꼬메르시우 광장까지는 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북쪽으로 올라가서 만나게 되는 통발 후작 광장과 그 뒤로 펼쳐져 있는 에드아루도(Eduardo)7세 공원등을 보기로 했다.


5년 전 왔을 때는 전혀 이곳에 대한 지식이 없었지만 에드아루도 7세 공원은 기억에 생생할 정도로 인상적이었었다. 이곳을 걸어 다니다 소위 말하는 잡상인에게 집사람이 앞치마와 주방 용품 등을 저렴하게 샀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의외로 제품의 질이 괜찮았었다.

순박했던 상인들의 모습들이 정겨웠었다.


공원 이라기에는 차라리 경기장 스탠드를 연상시키는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곳인데 이번에는 여기도 여기저기 공사 중 이어서 5년 전 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통발 후작은 이곳 광장뿐만 아니라 꼬메르시우 광장에도 그 동상이 있는데 시티 투어 버스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어보니 포르투갈에서는 대단한 영웅적인 존재였다. 아마 과거 리스본 이 지역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었었는데 그 당시 통발 후작이 리스본을 재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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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어제에 이어 살인적인 더위여서 시티 투어 버스의 2층 오픈된 공간에 있기도 힘들어서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앉아 있었는데, 그래도 아들은 꿋꿋하게 2층을 지키며 리스본의 모습을 눈에 담고 또 사진 찍고 있었다.


한 바퀴 돌고 다시 호시우 광장으로 오니 오후 1시 40분이 되었다. 너무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는지 갈증이 나서 카페에 들어가 콜라를 마셨는데 정말 큰 사이즈의 콜라를 단숨에 마셨다. 약 30분 정도 쉬고 나서 어제 제로니모스 수도원 갔던 방향의 시티 투어 버스를 다시 타고, 역시 나에게는 인상적인 장소였던 벨렝의 탑(Torre Belem)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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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5년 전 왔을 때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멋진 곳이었다. 일단 탑의 외관의 조각들이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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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층은 망루와 여러 대의 대포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바다를 지키는 요새같이 생각되었고, 지하로 내려가면 감옥의 분위기가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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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아보니 이곳 역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며, 마누엘 1세인 1515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완성까지 21년이 걸렸다고 한다. 탑의 형태가 우아한 드레스 자락과 비슷하다고 해서 ‘떼주강의 귀부인’이라는 애칭이 있다고 한다. 원래는 배의 통관 절차를 밟던 곳이라 하는데 스페인 지배 당시에는 정치범을 수감하는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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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한번 보았는데도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로웠고, 별로 크지도 않고 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인 것 같지도 않은데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지하에서부터 위층까지 오르내리는 데에는 계단을 이용하게 되는데 이 계단이 워낙 좁아서 딱 1명만 다닐 수 있게 되어 있다. 5년 전에는 이 계단에서 사람들끼리 마주치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이번에 보니 이곳에 신호등을 설치해서 오르내릴 때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시설을 설치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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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역시 이곳이 마음에 들어하는 듯했고, 꽤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것 같다.


다시 이곳에서 시티 투어버스를 타고 호시우 광장으로 왔고 오후 5시경 숙소로 돌아와서 아침에 계획하였던 빨래를 했다. 처음에 집주인은 건조기가 있으니 사용해도 좋다고 했는데 워낙 날이 더워서 건조대에서 말리기로 했다.

집주인은 어디서 꺼냈는지 선풍기 하나를 우리 방에 가져다주었는데 한국에서는 시골에 가도 보기 힘든 구형 모델이었다. 나는 옛날의 향수를 아들은 신기함을 느끼며 같이 선풍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곳 리스본은 올 때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 한국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무렵 보니 학생으로 보이는 포르투갈 인이 방에서 집주인과 같이 나오는 것을 보았는데, 내 짐작으로는 영어회화를 우리나라 과외수업 같은 형식으로 받고 나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집주인은 남아공에서 와서 이곳에서 학원 같은 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별도로 집에서 과외수업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이곳 포르투갈 역시 자체 산업이나 취직할 곳이 많지 않다 보니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이 큰 자산일 것이다.


그날 밤 역시 한여름 서향의 끔찍한 찜통더위는 선풍기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나의 숙면을 가능하게 해 주지 않았다. 옆에서 아들은 푹 자는 듯 보였는데 정말 잘 자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아빠가 걱정할 까 봐 자는 척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건 안 돼 보였다.

잠을 이루려고 노력하다가 마음을 바꾸어서 억지로 잠을 이루지 않겠다고 포기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였다. 하루 밤 안 잔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닐 테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 가기만 기다렸는데 정말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것 같았다.

그렇게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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