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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리스본에서 마지막 날

by Jason

리스본에서 마지막 날


오늘은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5년 전 리스본 떠날 때는 상당히 아쉬울 정도로 리스본 만의 소박한 매력에 푹 빠졌었는데, 이번에는 더위와 숙소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기쁠 정도이다.

역시 밤에 전혀 잠을 자지 못했고, 어제와 같이 몽롱한 상태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부터 사정없이 더위가 우리를 공격했고, 지난밤에 한 빨래는 건조대에서 바짝 말라 있었다.


오늘 저녁 7시 45분 비행기로 이탈리아 로마로 떠난다. 따라서 오늘 밤에는 이 지옥과 같은 곳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고, 또 로마에서는 아무리 등급이 낮아도 호텔인데 에어컨이 있을 테니 밀린 잠을 푹잘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고, 무엇보다 욕실을 편하게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반가웠다. 아들은 이런 나의 기대가 부담스러웠는지 로마 호텔이 워낙 싼 가격의 숙소라 아마 에어컨이 없을지도, 또 전용 욕실이 아닌 공용 욕실 일지도 모른다고 언제나처럼 미리 예방주사를 놓았다.


사실 5년 전 처음 리스본에 왔을 때는 예정에 없던 곳이었는데 파리 근교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만난 포르투갈인이 리스본을 너무 추천해서 일정을 바꾸어서 갑작스럽게 가게 되었다. 5월이어서 인지는 몰라도 그 당시 리스본은 태양은 뜨거웠지만 덥다는 느낌은 덜한 정말 좋은 날씨였다. 또 리스본 시내의 모습은 유럽 최빈국중의 하나인 나라답게 스페인과 많은 차이가 났지만 나한테는 너무 정겨운 광경이었다. 특히 다운타운에 있는 전차는 내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좋았고 도시를 돌아다니면서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0년대 서울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다시 한번 오고 싶은 도시였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정말 이 정도 일 줄은 몰랐고 이런 이유로 아들이 이 도시의 매력을 마음껏 느끼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어제와 같이 11시경 되어서 집을 나섰는데 오늘도 더위는 지치지도 않는지 오전인데도 벌써 달구어진 땅에서 지열이 올라와서 우리의 숨을 턱턱 막았다. 브런치를 먹어야 했는데 어차피 이곳은 카드가 다 안되었으므로, 카페에 들어가서 샌드위치와 프렌치프라이 에 탄산음료까지 제법 배불리 먹었다. 그래도 12유로 밖에는 들지 않았다. 포르투갈의 물가는 유일하게 날씨와 관계없이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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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 광장에 도착하자 아들은 공항 가는 버스 정류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거기 정차되어 있는 공항버스의 기사에게 몇 분 간격으로 출발하는지 공항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등등을 꼼꼼히 체크하였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집주인에게 공항 가는 버스를 확인하고 호시우 광장에 가자마자 버스 정류장을 확인했던 아들이었는데, 막상 떠나는 날이 되자 다시 한번 확인하는 꼼꼼함을 보여주었다. 내가 이런 면에서는 상당히 꼼꼼한 편인데 평소에 아들을 보면 나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번에 여행을 와서 같이 다니면서 아들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못한 여러 면들을 보는 것 같다.


다시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꼬메르시우 광장에서 어제와는 반대 방향인 동쪽으로 강변을 따라 올라갔다. 이 방면은 5년 전에도 가보지 못한 나한테도 첫 경험이었다. 가다 보니 1998년 리스본 엑스포 했던 곳이 나왔고 그중에서도 아쿠아리움이 눈에 띄었다. 아들한테 물어보니 놀랍게도 아직 한국에서 아쿠아리움을 못 보았다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어쩌면 이런 것까지 닮는지… 닮은 필요 없는데…

사실 나는 여수 엑스포까지 갔는데도 바로 옆의 아쿠아리움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 정도면 게으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런 이유로 아들과 나는 만장일치로 아쿠아리움을 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너무 더워서 아쿠아리움 내부는 물이 있으니 시원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또 저녁 비행기를 타야 하는 관계로 우리에게 오늘 허락된 시간은 오후 3-4시 정도까지였다.


입장료는 1인당 16유로였는데 우리같이 시티 투어 버스 티켓이 있는 사람들은 15% 할인을 해 주었다. 내부는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고, 우리의 기대대로 에어컨이 켜져 있어서 상당히 시원했다. 특히 남극의 펭귄이 있는 곳은 추울 정도여서 우리는 어느덧 본의 아니게 남극 생태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나머지 지역들도 다양하게 많은 어류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아들과 나는 서울 가면 한 번 삼성동에 가보아야 하겠다고 말했다. 내부에 있는 카페에서 음료수도 마시면서 쉬었고 우리는 여기를 리스본의 마지막 장소로 결정하고 그 시간을 잘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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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티 투어 버스의 48시간이 끝나는 시점이 오후 2시 22분이어서 아쿠아리움에서 나와서 버스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아서 잘못하면 버스 못 타고 택시 타고 돌아가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2시 15분경 버스가 와서 극적으로 마지막 탑승을 했다. 이번 여행 중 리스본에서 정말 시티 투어 버스를 알차게 이용한 것 같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먼저 샤워를 했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집주인이 나한테 오늘 리스본이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고 이야기했다. 오늘 최고 기온이 무려 43도를 기록했는데 본인이 기억하는 한 역사적 고점이라고 한다. 어떻게 돌아다녔냐고 나한테 걱정스럽게 물어보았는데, 정말 오늘 아쿠아리움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더위 먹고 쓰러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다. 오늘 저녁 이 방은 정말 찜질방 수준일 것이다.


어느덧 여행 시작한 지 2주가 지나서 늘어난 가방 무게가 걱정이 되었다. 그동안은 기차 타고 다녀서 가방 무게가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오늘로마로 가는 비행기 수하물은 20킬로를 넘으면 안 된다고 한다. 마침 집주인이 체중계가 있다고 해서 가방 무게를 측정해 보니 다행히 20킬로가 안 되었다. 체중계를 보자 우리 체중이 궁금해졌다. 2주 동안 하루 2끼씩만 먹고 더위에 하루 종일 걸어 다녀서 체중이 상당히 줄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생각 외로 1-2킬로 정도 밖에는 줄어 있지 않았다.


오후 4시 20분경 집주인과 작별하고 집을 나섰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집주인 이름이 Gerald라는 사실을 알았다. 젠틀하고 핸섬한 이 친구는 떠날 때까지 미안해했고, 내가 마지막으로 혹시 서울 올 기회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했다. 내가 너의 서울 여행을 도와주겠다고 하자 감사하다면서도 그럴 기회가 자기한테 과연 있을까 하면서 갑자기 표정이 너무 쓸쓸하게 바뀌어서 덩달아 나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남아공에서 이곳으로 와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이 사람에게 먼 한국땅으로 여행 온다는 상상도 사치일 것이다.


이번에 리스본 여행은 기대와는 다른 안 좋은 여행이었고 숙소 역시 최악이었지만 이 집주인은 지금도 기억할 정도로 착하고 진실된 사람이었다. 여행이란 것이 명소들을 보는 것 못지않게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그들과의 대화로 그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번 리스본 여행은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호시우 광장에서 공항으로 가는 Aero Bus를 탔고 운전기사 말대로 공항까지는 정확히 30분이 소요되었다. 요금은 3.5유로씩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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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모두 부치고 탑승을 위한 모든 절차를 끝내자 갑자기 시장기가 밀려왔다. 공항은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마땅히 먹을 만한 곳도 없어서 맥도널드에 들어가서 평소 먹던 햄버거 빅맥 세트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리스본의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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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7시 45분에 air portugal 비행기는 이륙했고, 기대했던 리스본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더위 때문에 좋은 시간을 못 보냈다는 아쉬움과 내일부터 시작될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기대가 공존했다. 3시간 후인 밤 10시 45분에 로마에 도착할 것이다. 아니 1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현지 시간으로는 밤 11시 45분이 될 것이다.


굿 바이 포르투갈! 굿 바이 이베리아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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