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정각에 세비야에서 출발한 야간 버스는 그냥 평범한 버스였다. 야간 버스라 혹시 약간 침대 형식을 빌리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기대는 무너졌고 의자에 기대서 잠깐씩 눈을 붙였다. 한국에서 이런 야간 버스에서 도난이 많다는 정보를 들어서인지 경계심으로 깊은 잠을 자기는 힘들었다. 도중에 2번 휴게소에서 쉬었고 스페인 시간으로 아침 6시 30분에 리스본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은 영국과 같은 시간을 쓰고 있어서 스페인과는 1시간의 차이가 났고 현지 시간으로는 아침 5시 30분이었다.
야간에 이동을 하면 하루 숙박비도 벌고 시간도 절약된다는 좋은 점이 있는 반면 대개 아침 일찍이나 새벽에 도착하면 모든 상점은 문을 닫고 있고, 심한 경우 대중교통도 이용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번 여행에서 몇 번 야간 이동을 해 보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피곤한 여행이고 특히 도착지에서 이른 아침 숙소 체크 인 때까지 시간 가기만 기다리는 것은 참 힘들었다.
리스본도 우리 숙소는 B&B에서 구한 게스트 하우스라고 하는데 이른 새벽에 갈 수 없어서 시간을 보내야만 했는데 모든 점포가 문을 열지 않아서 터미널 내의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시간 가기만 기다렸다. 새벽 동이 트자 아들이 집주인과 연락하는 듯하더니 마음씨 좋은 주인이 지금 와도 좋다고 허락했다고 한다. 아들은 예상을 깨고 택시로 이동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 시간에 다른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터미널 택시 정류장에서 우리가 갈 집 주소를 보여주니 택시 기사가 잘 모르겠는지 주위의 다른 택시 기사들과 서로 이야기하는데 포르투갈 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들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토론이 끝나고 택시기사가 출발했는데 어떤 주택가로 들어와서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아들이 집주인 전화번호를 주었고, 운전기사는 집주인에게 전화로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잘 찾아가지 못하였다. 초행길인 우리가 봐도 같은 지역을 여러 번 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 기사가 미터기를 꺾고는 포르투갈 어로 이야기했는데 아마도 더는 요금 받지 않고 찾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집주인이 밖에 나와 있었다. 요금은 8유로 정도 나왔다.
집주인은 30대 말이나 40초반으로 보였는데 상당히 젠틀하고 잘 생긴 좋은 인상의 얼굴이었다. 전형적인 포르투갈인과는 조금 다른 듯했는데, 나중에 이야기해보니 남아공 사람이었다. 직업은 영어를 가르친다고만 했고 덕분에 완벽한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해서 대화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 5년 전 리스본 왔을 때는 포르투갈 언어의 악센트가 짙게 배인 영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는데…
택시에서 내린 후에도 좁은 골목길의 가파른 경사를 더 올라가고 또 옛날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안암동 주택가 같이 계단도 많았다. 큰 짐을 하나 씩 들고 가는 우리는 죽을 맛이었고 마음씨 착한 집주인은 마치 자기 잘못이나 되는 양 미안해하면서 우리 짐을 대신 들어주려고 하는데 그렇게 까지 할 수는 없었다. 겨우 집에 도착해서 고행이 끝나나 하는 순간 다시 4층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이쯤에서는 아들이 또 미안해한다. 다음부터는 몇 층 인지를 꼭 확인해 봐야겠다고 하면서…
4층에 올라가서 집에 들어갔는데 방이 3개인 것 같았다. 한방은 집주인이 사용하고 다른 한방은 네덜란드에서 온 자기 친구라 한다. 살짝 열린 방문으로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금발의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방으로 안내했는데 역시나 좁은 방이어서 침대 한대 들여놓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이런 경우 우리는 가져온 큰 가방을 펼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방에 들어서자 오늘 하루의 에너지를 이미 모두 쓴 듯하다. 몸도 지쳤지만 무엇보다 밤새 버스를 타고 와서 인지 정신이 멍했다. 집주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 곳 리스본은 예년보다 훨씬 더위가 심하고 심지어는 바닷가라 습도도 높다고 한다. 5년 전 5월의 좋은 날씨만 입력되어 있던 그래서 기대가 컸던 나에게 힘 빠지는 이야기이다.
주인이 쉬라고 하면서 나가자 우리는 씻지도 못하고 일단 침대에서 밀린 잠을 잤다.
막상 졸음이 쏟아졌는데도 누우니까 잠이 잘 안 왔고 9시경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다시 좁은 욕실을 만나니 그라나다의 호텔이 그리워졌다.
좁은 공간이라 짐을 풀 형편은 못 되었고 리스본에서 입을 옷 몇 가지만 겨우 꺼내놓고 다시 가방을 닫을 수밖에 없었고,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밀린 스마트 폰 업무(?)를 보느라 아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 옆에서 하염없이 기다렸고(사실 이 시간이 여행 중 나한테 가장 지루한 시간이었다), 12시경이 되니 아들이 나가자고 한다.
스페인에서는 도시 중앙의 광장마다 음용이 가능한 식수대가 있어서 아들은 2리터짜리 생수통을 가지고 다니면서 물을 받아서 마셨다. 유럽에 다녀오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식당에 가서도 물을 돈 주고 사 먹어야 했으므로 물 값도 장난이 아니었을 텐데 스페인에서는 아들이 이렇게 알뜰하게 무거운 물통을 들고 다니면서 광장에 갈 때마다 물을 보충한 덕으로 크게 불편함 없이 지냈었다. 물론 아들은 이 물통을 들고 다니느라 고생했지만…
하긴 물도 돈을 받지만 화장실도 유료인 이곳에서 한국에서와 같이 많은 물을 마실 수 없었다. 마신만큼 화장실을 가야 했기에…
리스본에서는 수돗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밖에 나오자 동네 조그만 슈퍼에서 1.5리터짜리 생수를 1.75유로 주고 구입했다. 리스본에서는 이 생수통에 계속 물을 받아 마실 계획이었다. 아들 때문에 경험하게 된 배낭여행은 정말 나도 그동안 알뜰하게 여행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근검절약의 여행 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서 광장 쪽으로 걸어오는데 얼마나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는지 저녁에 다시 이 집을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내려왔다. 길눈이 밝은 아들은 전혀 걱정 없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광장 못 미쳐 조그만 식당이 있어서 여기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밖에 식탁들이 있었고 실내에 들어가 보니 에어컨이 켜있어서 너무 시원했다. 실내에 앉기로 하고 간단한 브런치 메뉴를 시키니 밖에 나가서 앉아야 한다고 한다. 실내에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요리 정도는 시켜야 앉을 수 있다고 해서 할 수 없이 밖에 나가 앉아서 먹었다. 5년 전 리스본의 첫 느낌은 상당히 친절하고 따뜻한 인간미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첫날 이 인상은 무참히 깨져 버렸다. 아무래도 그때는 호텔에 있었고, 서민들이 사는 이 뒷골목의 인심은 가뜩이나 유럽에서 최빈국중의 하나인 포르투갈 경제 사정을 감안할 때 퍽퍽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 중에 어떤 아주머니가 주인과 심하게 말다툼을 하면서 시끄럽게 하는 등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못 사는 동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모두들 카드를 안 받고 현금만을 받았다. 스페인에서도 생각보다 현금만을 받아서 당황스러웠는데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내려왔을 때는 정말 그 정도가 심했다. 리스본은 그보다 더 한 것 같았다. 카드가 당연히 다 될 줄 알고 최소한의 현금만 가져온 나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아들 말을 안 들은 것을 후회했다.
같은 여행이라도 배낭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모든 식당과 점포는 호텔 등과 달라서 카드를 안 받았고, 현금만을 요구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한국도 모든 거래에 카드가 사용 가능해졌고, 아마도 카드 사용률이 세계적으로도 상위 랭킹에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나는 남부 유럽에서 약 20년 전의 한국의 상황에 부딪히고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배낭여행의 환경에 대해서 내가 정말 많이 무지했던 것 같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광장 쪽으로 나오는데 정말 더웠다. 호시우 광장으로 나와서 스페인과는 또 다른 포르투갈의 광장 분위기를 느끼고 남쪽으로 쭉 걸어 내려갔다.
남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강이 떼 주강이다.
유럽에서 만나게 되는 작은 강이 아니라 우리나라 한강보다도 큰 강이어서 5년 전 처음 보았을 때는 지중해 인 줄 알고 아내에게 지중해라고 자신 있게 말했었다. 아마 아내는 아직까지 여기가 지중해인 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떼주강변에 있는 광장이 꼬메르시오 광장인데 리스본에서 가장 크면서 아름다운 광장이다. 일단 강변에 위치해서 시원해서 좋았다.
이 광장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돈 조세 1세의 동상이라 한다. 또 아름다운 개선문이 있는데 뽕발 후작과 바스코 다 가마의 조각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5년 전에는 이곳이 너무 인상적이었는데 무슨 행사가 있는지 각종 부스 등이 설치되어있었고 떠들 석한 재래시장 분위기였는데 5년 전 모습을 기대하고 있던 나로서는 실망스러웠다. 원래 이 광장은 다양한 행사의 장소로 사용된다고 한다.
리스본 시민들의 휴식처인 이곳에서 강을 바라보며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식히고 있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더위에 계속 걸어 다니면서 관광한다는 것이 무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시티투어 버스를 알아보았는데 2일에 1인당 19유로씩이라 한다. 우리 일정으로는 모레 저녁 비행기로 이탈리아 로마로 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2일이 48시간으로 계산되는 것인지 아니면 날짜로 2일만 사용할 수 있는지 문의했는데, 첫 번째 탑승한 시간으로부터 48시간 동안 유효한 표라고 한다. 그러면 이 티켓으로 마지막 날 오후까지 버스 이용이 가능해졌으므로 바로 표를 구입했다. 이제 이 버스 티켓이 리스본에서의 우리의 기동력을 마지막 날까지 책임져줄 것이다.
일단 이 버스를 타고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몸도 마음도 피곤해서 버스를 타고 리스본을 둘러보기로 했었는데, 5년 전 가장 인상 깊었던 곳 중의 하나인 제로니모스 수도원이 보이자 내려서 보기로 했다.
더운 날씨 임에도 이곳에는 인파가 상당히 많았고, 수많은 관광버스들도 와 있었고, 시티투어 버스에 가득 타고 있었던 사람들도 이곳에서는 거의 다 내렸다. 이 수도원은 1502년 마누엘 1세 때 엥리케 왕자의 업적과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을 기념하기 위해서 짓기 시작한 수도원이고, 그로부터 한참 뒤인 1672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고 한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고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외관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곳이다.
그러나 내부는 더 볼만한 것들이 많이 있으므로 입장료 7유로씩을 내고 들어갔다. 내부의 많은 조각들과 아치가 너무 아름답고, 특히 내부 정원은 5년 전과 같이 깨끗하고 정갈한 정돈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오늘 더위로 인한 지친 몸에 다시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서 리스본의 명소이자 랜드마크가 되어 있는 엘레바도르 산타 후스타(Elevador Santa Justa)에 올라갔다. 이곳은 약 30미터 높이의 엘리베이터 승강장이다. 1902년에 설계되었다고 하며 일단 옛날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리스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고급 레스토랑도 있다. 요금은 1인당 2.9유로이다.
제법 바람도 불고 해서 맨 위에서 시내를 바라보며 쉬고 있는데 아들이 화장실이 급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부탁했는데 너무나도 친절하게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허락해 주었다. 고맙기도 하고 마침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도 되어서 이곳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럽고 비싼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아들은 자기가 화장실을 이용하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미안해한다. 워낙 독립심이 강한 아들이라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까지 아빠 신세를 안 지고 원래 계획되었던 배낭여행을 고집할 줄은 몰랐다. 이럴 때마다 대견하기도 했지만 한편 섭섭하기도 했고, 자식들이 철이 들수록 부모와는 거리감이 생기는 것 같다.
아무튼 여행 떠나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되었다. 피자와 파스타를 시켜서 둘이 같이 share 하기로 했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음식이 맛있어서 좋은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유럽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역시 우리 입맛에는 이탈리아 식사가 맞는 것 같다.
오랜만에 물도 마음껏 마시고 배부르게 먹었는데도 생각보다는 적은 23유로밖에 안 나왔다. 아마도 이것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체감물가 차이일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먹었던 식사에 비하면 2배 이상 비싼 식사였고, 아들도 만족해해서 내 마음이 뿌듯했다. 사실 여행을 떠나면 나는 그 나라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여행의 중요한 일부분이라 생각해서 요즘 말로 하면 먹방을 즐기는 편인데 이번 아들이 주관하는 배낭여행은 먹방은커녕 생존을 위한 식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들의 여행을 존중해 주기로 했지만 자식들이 잘 먹는 것을 보면 뿌듯해지는 모든 부모들의 열망만큼 앞으로 여행을 하면서 아들의 원칙을 깨고 맛있고 비싼 식사를 사주고 싶었다.
그래도 이번 여행의 대원칙인 아들의 아들에 의한 아들을 위한 여행을 내가 잘 준수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한 끼의 제대로 된 식사는 거의 고갈 상태에 있던 우리 체력을 회복시켜 주었고, 숙소로 걸어올 때 발걸음은 상당히 가벼웠다. 아침에 한번 와 보았던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헤매지 않고 한 번에 숙소를 찾아가는 아들의 신통력은 또 한번 나의 감탄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