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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son Jun 05. 2016

50. 파리 도착 및 숙소

 파리 도착 및 숙소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 보니 오늘 아내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고 우리는 다음 여행지인 프랑스 파리로 떠나는 날이다.  

아내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부터 합류해서 어제 룩셈부르크까지 3명이 정말 즐거운 여행을 한 것 같다.  이제 오늘부터는 나와 아들만의 여행이 다시 시작되는 셈이다.  오늘은 7월의 마지막 날인 7월 31일이다.  내일부터는 8월이고 그러면 아들과 나의 여행도 8월 12일이 마지막 날이니 이제 정확히 13일 남은 셈이다.  남은 나라도 프랑스, 덴마크, 그리고 영국 3개국만 남았다.  이번 아들과의 여행도 약 75% 정도 진척된 셈이다.


아침 식사 후 아내는 호텔 근처에 있는 구두 파는 상점에 가서 본인 구두를 사 오더니 다시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어제 들어오면서 봐 둔 곳인 모양인데 질이 좋고 가격은 저렴하다고 한다.  이곳에 와서 보니 구두도 대부분 독일제이다.  한국에서 독일제 구두가 그리 성행하지 않다 보니 나름 스타일등이 독특하기는 하다.  독일 제품 특징답게 튼튼한 것은 덤이고…

덕분에 아들도 구두를 하나 장만할 수 있었고 상당히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엄마와 아빠의 차이점 같다.  아빠랑 오래 여행했어도 장만하지 못했던 것을 엄마는 단숨에 해결해 주었다.  쇼핑에 있어서 남자가 여자를 이기기는 태생적(?)으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제 내 고장 난 가방으로 필요 없는 짐들을 모아서 아내가 한국으로 들고 가고 나는 아내의 가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아내가 가져갈 짐이 너무 무거워지는 것이 아닌 가 하고 걱정되었는데 아내는 괜찮다고 한다.(아줌마는 힘이 세다고 하면서)  아내가 타고 갈 비행기는 독일 루프트한자였고 수하물 중량이 20Kg으로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 가방 무게를 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대충 내가 들어보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호텔을 나와서 기차 중앙역으로 갔다.  택시를 알아보니 생각보다 이곳에서 공항이 거리가 먼 것 같았다.  꽤 비싼 요금을 요구했는데 이를 듣고 아내는 한사코 공항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마도 아들과의 여행에서 배낭여행의 정신을 배운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공항버스에 짐을 실어주는데 아까와는 달리 무게가 상당하다는 것을 느끼고 아차 했는데 이제는 어쩔 수없었다.  나중에 공항에서 아내가 연락 왔는데 가방 무게가 자그마치 25Kg도 훌쩍 넘었다고 한다.  그래도 루프트한자의 친절한 직원이 추가 부담 없이 가방을 실어 주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석에 여유가 있었는지 좌석 업그레이드까지 해 주었다고 한다.


이제 아들과 나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역 안으로 들어가서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의 짐들 중 앞으로 13일만 버틸 짐만 남겨놓고 다 보냈으므로 가벼워졌고, 그동안 피렌체 여행 이후 손잡이가 항상 말썽이었던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니느라 크게 고생했던 나는 아내가 이번 여행에 처음 가지고 온 새 가방을 끌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처음에 아들과 둘이 여행할 때는 못 느꼈는데 아내가 빠지고 다시 둘이 되자 상당히 허전했다.  아마 아들도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일부러라도 그런 이야기를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고 이런 아들의 영향을 받아 나도 떠나간 엄마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다 보니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둘이 각자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기만 했고 별 대화 없이 가고 있었다.


사실 파리는 나도 아들도 그리고 오늘 한국으로 떠난 아내도 여러 번 와 본 도시이다.  그래도 올 때마다 파리는 늘 좋았고 이번에도 촘촘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건너 띄기는 너무 서운했는지 아들은 3박 4일을 파리에 배정을 했다. 

기차 안에서 아들이 오랜 정적을 깨고 이야기했는데 그나마 안 좋은 소식이었다.  파리의 숙소는  지금까지의 엄마와 같이 있을 때의 숙소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Air B&B에서 아주 저렴한 곳을 택했다고 한다.  아내가 떠나자마자 나의 품격은 바로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었고 이래서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아내 눈치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나 개인적으로는 파리는 아주 색다른 추억이 있는 곳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리 집의 성인식인 혼자 유럽 배낭여행 1개월을 다녀온 아들은 그때 파리를 처음 가 보았다.  그 당시 한국인이 하는 숙소에 머물렀던 것 같은데 그 후에 나와 아내가 파리를 갈 일이 있었을 때 아들이 머물렀던 숙소의 한국인 주인이 나를 꼭 만나보았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아들이 전해왔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도 했는데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파리에 갔을 때 이 숙소 주인과 만나게 되었는데 아직 아이도 없는 젊은 신혼부부였다.  파리에 거주하면서 방들을 한국에서 오는 손님에게 내어주고 식사도 제공하는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일종의 하숙을 하고 있는 셈인데 여러 한국 사람들이 묵고 있었다.


숙소 주인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는데 이 곳 파리에 있다 보니 프랑스의 대학생과 한국의 대학생들이 선명하게 비교가 되는데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하였다.  그래도 파리에 오는 한국의 대학생들은 교육도 잘 받고 집안도 어느 정도 사는 사람들일 것 같은데 프랑스의 대학생들에 비해서 전혀 성숙되지 않았고 너무 철부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면서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파리로 여행 오는 학생들도 많은데 모두들 대동소이하다고 하였다.  정확히 어떤 면이 그러한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 하였지만 이곳에서 직접 피부로 체감하는 이 분의 느낌이니 객관성이 있을 것 같았다.


내 아들이 이곳에 머물 때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첫째는 고등학교 막 졸업한 사람이 그것도 영어가 능통하지도 않으면서 혼자 이렇게 오는 경우가 처음이어서 놀랐고 두 번째는 나이는 제일 어린데도 처음으로 파리 학생들과 같은 수준의 어른스러움과 자립심이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그 부모님을 꼭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고 특히 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빠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아서 나를 꼭 만나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고등학교 갓 졸업한 어린 학생을 그것도 영어도 능통하지 않은 아이를 혼자 유럽으로 보내는 아빠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다고 한다.

본인들도 곧 아이들이 생길 텐데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 지의 방법들도 들어보고 싶은 눈치였다.


순간 난감했다.  아들이 여기 파리에 오는 학생들과는 격렬했던(?) 사춘기 때문에 전혀 다른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 텐데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망설여졌다.  물론 이런 세월을 보내다 이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본연의 자리에 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 보니 같은 나이의 아이들보다 더 성숙해지고 일찍 철이 든 것이 주원인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 당시는 군대에 가 있던 아들이 과연 제대 후 어느 정도 수준의 대학에 갈 수 있을지 확률적이나 경험적으로나 암담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과연 어떻게 자식을 잘 키웠는지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지 주저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이미 이 주인은 아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지 아들의 과거(?)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다.  아들은 아마도 그런 상황을 벗어나는데 부모님이 큰 역할을 했고 특히 그중에서도 아빠 이야기를 많이 한 듯 싶었다.  암튼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이 숙소 주인도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만족해했고 자기도 나 같은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과분한 덕담도 해 주었다.


그런데 대화 중 들었던 한 이야기가 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 당시는 지금같이 모바일이 발전해 있던 시기가 아니어서 컴퓨터로 나누는 이메일이 가장 첨단의 소통기구였을 때인데 아들은 며칠 간격으로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면서 한글이 안 되는 곳에서는 영어로 보내왔었다.  물론 많이 부족한 영어였지만...

그런데 파리에 있으면서 한국인 숙소로 알고 있었는데 이메일이 영어로 왔었었다.  그 당시 나는 숙소 주인이 한국인이지만 한글이 안 되는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단순히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들이 그곳에 같이 머물고 있던 미국에서 유학 중인데 방학을 이용해서 온 학생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이메일을 영어로 작성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숙소 주인이 이런 아들이 의아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아들의 대답은 영어로 보내면 아빠가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숙소 주인이 아빠가 그렇게 무섭냐고 물어보니 아들의 대답은 무서워서가 아니고 자기는 앞으로 다시는 아빠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보지 못했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들의 생각을 듣게 된 것이다.  나는 아들이 자신이 부모를 힘들게 했던 점이 미안하고 그리고 끝까지 자신을 믿어 준 아빠에게 고마운 마음도 조금 있을 것 같다는 정도의 느낌만 있었지 아들이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를 전혀 몰랐었다.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와서 이 마지막 이야기가 계속 생각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고 눈물이 계속 나와서 베개가 젖어왔을 정도로 이 이야기는 내 가슴을 저리게 했다.  또 암울하기만 했던 아들의 장래 그중에서도 대학진학에 대한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 더욱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러면서 굳게 다짐도 했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도와서 아들의 앞날을 열어주기로... 그리고 과거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고 앞만 보고 아들과 함께 이 난관을 풀어갈 것을...


아들은 엄청난 노력을 했고 좌절하면 또 도전하는 불굴의 정신력으로 결국 대학에 합격하였고 그 덕분에 나도 대학생인 아들과 함께 배낭여행을 왔으니 파리에서 그날 밤의 기억은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즐거운 추억이 되었다.  나 역시 그날 밤 다짐한 대로 그 이후 단 한 번도 아들의 과거에 대해서 책망한 적이 없고 현실적으로 닥친 일들을 아들이 풀어나가는데 도움을 주려 노력했으니 어느 정도 내 할 일은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고 이런 이야기를 아들에게 하는 것조차 과거를 책망하는 것처럼 비추어질까 봐 아들에게는 이야기 안 했다.  아마 이 글을 보고 아들은 알게 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기차는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 도착해서 보니 아들이 잡은 숙소의 위치는 루브르 박물관 근처의 정말 중심지였다.  에스컬레이터가 없고 유난히 계단이 많은 파리의 중앙역은 큰 짐을 들고 다니는 우리를 힘들게 했고 겨우 탄 지하철도 인파가 많아서 쉽지 않았다.  루브르 박물관역에서 제법 큰 길로만 몇 번을 꺾어서 가더니 큰 집 앞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집주인과 전화 통화를 했다.  집주인은 회사원인지 집의 문 아래에 열쇠를 숨겨놓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는 먼저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집은 5층에 있었고 당연히 엘리베이터는 없었고 옛날 건물답게 층간 높이는 높아서 나선형의 계단을 어지러울 정도로 뱅뱅 돌아 올라가면 겨우 한 층을 올라갈 수 있었다.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에서 시원함을 경험하고 온 우리를 다시금 엄청난 더위를 맛 보여 주더니 모든 상황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듯이 고난의 연속이었다.  


큰 가방을 들고 고생해서 열쇠를 열고 들어갔는데 조금 이상했다.  바로 작은 거실만 있는 원룸인 듯했는데 안쪽에 큰 침대 하나만 겨우 들어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집주인이 있을 공간이 없어서 체코 프라하처럼 우리에게 독채를 준 것이 아닐까 하고 기대했는데 아들은 가격으로 볼 때 절대 그럴 것 같지는 않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집주인과 전화를 해 보더니 우리가 안쪽의 작은 방을 쓰고 집주인이 거실의 소파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너무 암담했다.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방이 좁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화장실을 가거나 샤워를 하려고 해도 집주인 있는 곳을 거쳐서 가야 했는데 너무 불편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좁은 방의 문까지 닫고 있으면 너무 답답할 것 같았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었고... 거기에 화장실도 좁고 샤워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어서 여행 첫날 바르셀로나의 악몽을 떠오르게 하였다. 

아들도 너무 하다고 생각했는지 할 말을 잃고 있었고 나는 차라리 근처의 호텔을 알아보고 옮기는 것이 어떨지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 상황이면 내 생각에는 air B&B로 사용하면 안 되는 공간 크기이다.


그래도 어떻게 하던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안해하는 아들을 달래고 짐을 방에 들여놓으니 푸는 것은 고사하고 큰 짐 2개를 들여놓으니 방에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하룻밤 정도면 참을 수 있을 텐데 하필 이곳에서는 3박 4일이 예정되어 있으니...

아들은 모든 힘이 다 빠지는지 바로 침대에 눕더니 스마트폰으로 여러 가지 소통(?)을 하고 있었다.  오후 2-3시경인데도 밖으로 나갈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아들의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나도 누워서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졌다.


갑자기 옛날 아버지가 해 주시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외국이나 지방에 출장 가면 밥은 절약해서 먹더라도 숙소는   반드시 좋은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이 이야기를 아들에게 제대로 전파(?) 하지 못한 나의 책임도 상당히 클 것 같았다.  

air b&b가 많은 투자자들을 끌어들이는 상당한 비즈니스 모델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지만 이 순간 나에게는 전혀 투자할 마음이 없는 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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