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가는 날이다. 오늘 가서 내일 저녁에 돌아오는 1박 2일 일정인데 런던 숙소에서 집주인인 할머니가 그냥 짐을 놓고 다녀오라고 해서 가벼운 짐만 하나씩 둘러메고 떠나는 여행이다. 물론 숙박비 없이 이런 편의를 봐주었는데 고마운 영국 할머니였다.
이곳에서도 아침 식사를 제공한다고 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이어서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아침 제공하는 숙소인 것이다. 샤워하고 내려갔는데 할머니가 깔끔하게 아침을 차려 주셨다. 빵과 버터와 잼, 우유, 주스 그리고 요구르트 등에 간단한 계란 요리까지 해 주셨는데 영국이 자랑하는 본 차이나 고급 큰 접시에 제대로 담아주셔서 아침 식사인데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거기에 이 친절하신 할머니는 어제 어디를 다녔는지 등을 물어보며 많은 관심을 보이셨다. 드디어 여행 마지막에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최고의 B&B를 만난 것이다. 현지인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고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그런 좋은 기회였다. 우리에게 식사를 다 차려주시고는 음료수나 빵이 더 필요하면 냉장고에서 꺼내 먹으라고 위치까지 가르쳐 주시고 다 먹은 식기는 설거지 통에 가져다만 놓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본인은 각종 곡물을 그릇에 담아서 그 위에 플레인 요구르트를 토핑 해서 방으로 가지고 가셨다. 아마도 이 식사가 이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건강식인 모양이다.
아들과 둘이 맛있게 아침을 먹으며 그동안의 B&B와 차별되는 이곳을 즐겼다. 아들은 이제 끝날 때 되니 어떤 B&B를 선택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고 하였다. 상당히 늦은 감이 있지만 앞으로 아들의 여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사실 이제 돌아보아도 파리 정도가 끔찍했지 나머지 B&B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집을 나서서 핌리코 전철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고 킹스 크로스(Kings Cross) 역으로 갔다. 이곳에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향하는 기차가 출발한다.
런던은 유럽의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런던 중앙역 이런 곳이 없다. 그동안 다른 유럽의 도시들은 모두들 도시의 중앙역이 있어서 이곳에서 모든 기차를 타면 되었는데 (물론 몇 군데는 중앙역이 동역과 서역 남역등으로 구분되었음) 런던은 역들의 명칭이 다 제 각각이고 어느 역도 런던 중앙역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유는 런던의 모든 역들이 국영이 아니고 사유 철도이기 때문이다. 사유 철도를 허가하면서 런던이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또 사유 철도를 개설할 때 이미 중심지가 다 건설된 후이기 때문에 약간 외곽에 다들 위치하고 있고 각 역마다 담당하는 지역이 있다.
어제 우리가 도착한 개트윅 국제공항은 런던 중심지에서 남서쪽에 위치하는데 이쪽에서는 모두 빅토리아 역으로 온다. 또 오늘 가는 킹스크로스 역은 북쪽 지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의 북동부 그리고 스코틀랜드 동해안 방면을 다 담당한다.
킹스크로스 역에서 에든버러로 향하는 기차는 9시에 출발해서 오후 1시 20분 에든버러 도착이다.
아들이 브리티시 패스는 3일을 구입해서 왔는데 어제 개트윅 공항에서 빅토리아 역까지 급행열차를 한번 사용했고 이제 에든버러 왕복으로 나머지 2장을 모두 사용하게 된다.
아들과 나 모두 스코틀랜드는 이번이 처음 방문하는 곳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책에서만 보고 상상하던 곳을 직접 가 보게 되어서 기대가 컸고 또 골프의 발상지이며 브리티시 오픈이 열리기도 하는 세인트 앤드류스를 한번 가 보고 싶었다. 아들도 동의했는데 알아보니 생각보다 에든버러에서 버스를 이용해서 다녀오는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려서 포기하기로 했다.
에든버러에서의 숙소도 B&B라 하는데 스코틀랜드 억양이 워낙 유명해서(아직 경험해 본 적은 없다) 걱정도 되고 또 호기심도 일었다.
계속 북쪽으로 달리던 기차는 우리에게 너무나 멋진 주변 경관을 보여주었는데 원래 이 구간이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오후 1시 20분 경이 되자 곧 에든버러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나왔는데 갑자기 대부분의 승객들이 일어서더니 선반 위에서 짐을 꺼내서 두꺼운 외투를 입는 것이었다. 그것도 거의 한겨울에 입는 외투였다.
다행히 긴 바지는 입었지만 반팔 셔츠 하나씩 입고 있었던 아들과 나는 당황했다. 사실 브리티시 오픈 골프 시합을 할 때 보면 8월임에도 선수들이 스웨터를 입고 털모자까지 쓰고 플레이하는 것을 본 기억도 났다. 그래도 가져온 짐에 긴팔 셔츠들이 있으니 그것으로 버텨보고 정 안 되겠으면 두꺼운 옷을 사면 될 것 같았다.
마침내 기차는 에든버러 웨버리(Waverley) 역에 도착했다. 역 안에 빵을 파는 곳이 있었는데 이곳만의 빵 종류인지 낯선 샌드위치가 보여서 닭 가슴살을 곁들인 샌드위치를 한번 사 먹어 보았다. 나름 맛이 있었으나 기대했던 만큼 특색 있는 맛은 아니었다. 가격은 10.5파운드였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날씨는 시원했는데 추워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첫인상은 그렇게 고색창연하지도 않았고 역 주변이라 그런지 상당히 번잡하고 그렇게 깨끗한 편도 아니었다.
아들이 숙소를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원래 좋은 감각에 오랜 여행으로 더 숙달이 되었는지 단번에 찾아갔다.
3층으로 올라갔더니 문을 열어주는데 젊은 여성이었다. 환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맞아 주었는데 덩달아 우리도 기분이 좋아졌다. 집주인인가 하였더니 집주인은 따로 있고 자기는 집주인의 여자친구라고 소개했다. 이 집에서 같이 동거하고 있었다.
우리 방으로 안내했는데 상당히 넓었고 구조상 침실보다는 서재나 작은 응접실 정도로 사용하는 공간 같았다. 암스테르담의 숙소와 비슷한 느낌이다. 고색창연한 내부는 나름 나쁘지 않았다.
일단 밖으로 나왔다. 에든버러는 다른 유럽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어 있다. 이 중 신시가지인 New Town은 명칭이 우리와 흡사해서 최근에 조성된 시가지로 생각하기 쉬운데 18세기 말에 조성된 거리이다. 이 신시가지에서도 Princes St. 는 가장 중심이면서 쇼핑가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당시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주택가였고 이 길에서 구시가로 넘어가는 곳에 Princes St. Garden이라 불리는 상당히 넓은 정원이 있는데 이 정원이 이들만을 위한 정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공원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를 가지는 것이 부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영화 노팅힐에서도 런던 북서쪽의 지역인 켄싱턴 스트리트의 넓은 공원이 나오는데 이곳에 들어가 보고 싶어 하는 줄리아 로버츠에게 휴 그랜트는 사유지여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결국 두 사람은 담을 넘어서 몰래 들어가지만…
이 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 보면 칼튼 힐(Calton Hill)이라는 언덕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에든버러 전경이 최고라고 한다. 단순한 언덕으로 생각하고 올라갔는데 말도 안 되게 전혀 언덕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러 건물들이 보였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정말 좋았다.
이 전경이 유럽에서는 가장 좋은 전경 중의 하나로 꼽히며 특히 우리보다 더 늦은 시간에 해가 질 무렵의 경치는 최고라고 한다.
이 언덕 위를 걸어 다니다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은 건물들이 눈에 띄는데 그중 압권은 그리스풍의 건물도 있다.
왜 이런 형태의 건물이 언덕 위에 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이 그리스 신전 같은 건물 하나 때문인지 에든버러를 스코틀랜드의 아테네라 부른다는데…
이곳의 날씨는 언덕 위 여서인지 제법 쌀쌀했다. 봄에 입을 얇은 스웨터를 입었는데 오히려 더 입어야 할 듯했다. 나보다 더 추위에 강한 아들도 이탈리아에서 구입한 점퍼를 입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남부와 중부 유럽에서 겪었던 혹독한 더위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이곳 날씨는 우리나라 가을 날씨였고 특히 여름 중 가장 덥다는 8월 초순임을 감안하면 더위에 약한 나와 아들에게는 천국같이 생각되었다.
생각보다 넓은 언덕 위를 이리저리 거닐면서 주변 경관을 만끽하다가 내려왔다.
내려와서 워털루 광장 지나면 바로 우리가 내렸던 웨버리 역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뉴타운의 번화가인 Princes St. 가 시작된다. 이 거리 초입에 스콧 마뉴멘트(Scott’sMonument)가 있다.
스코틀랜드의 작가인 월터 스콧 경을 기념하기 위한 탑이라 하는데 1844년에 세워졌고 높이가 60미터라 하는데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동상 탑보다 5미터가 높다고 한다. 이것이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자존심이라 한다.
탑 밑부분에 있는 동상이 월터 스콧 경이다.
이 거리는 역시 가장 번화가이고 고급스러운 거리답게 수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쇼핑샵들이 많이 모여있는 이 거리를 거닐면서 우리도 부지런히 눈으로 검색하고 있다가 나는 스포츠 의류 파는 곳으로 들어가서 스코틀랜드 냄새가 물씬 나는 스코틀랜드 국기인 세인트 앤드류스 크로스가 새겨져 있는 티셔츠를 하나 샀다. 점원으로 있는 꽃미남과의 알바 학생이 나를 많이 도와주어서 이 티셔츠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가격도 14.99파운드였으니 정말로 득템 한 셈이었다. 나오면서 이 학생에게 고맙다고 말했는데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혹시 내가 구입한 이 가격을 보고 스코틀랜드 물가는 저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영국의 물가 수준에 대해서는 많은 보도를 통해서 접하셨으리라 생각한다.
대신 나같이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득템이 가능하다.
이 프린세스 스트리트를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로즈 스트리트(Rose St.)가 있는데 이곳에는 많은 레스토랑과 펍들이 모여있다. 여기서 저녁식사를 할 겸해서 메뉴를 보고 적당한 곳으로 들어갔는데 아들이 나에게 이곳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음식인 하기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아들도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고 책에서 이런 요리가 있다는 이야기만 본 모양이다.
그 나라의 전통 요리는 무조건 먹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나는 당연히 하기스와 오리 가슴 고기 그리고 맥주를 시켰다. 하기스는 소시지의 한종류인 듯 보였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소나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서 소의 위에 넣고 삶은 요리로 우리의 순대와 같은 요리로 생각되었다. 다만 돼지 내장을 돼지 소장에 넣어 만드는 우리 순대와 소 내장과 소의 위에 넣어 만드는 것만 차이 날 뿐이다. 지금도 하기스 맛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그저 유럽에서 먹는 소시지 맛과 비슷했던 것 같다. 하여튼 스코틀랜드에서의 전통요리로 제대로 된 첫 번째 식사였는데 좋았고 특히 레스토랑의 분위기도 이 지역 분위기여서 좋았다. 가격은 29.20 파운드가 나왔다.
식사까지 하고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해는 질 줄 모르고 밝은데 사람들은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에든버러의 분위기를 음미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집주인이 있어서 인사했는데 내가 생각하던 전형적인 스코틀랜드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안경을 쓰고 반듯하고 잘 생긴 젊은 남성이었다. 발음 역시 너무나 알아듣기 편한 미국식 발음이어서 잔뜩 걱정하고 기대했던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여자친구와 같이 서서 이야기하는데 남자가 여성보다 더 예쁘장했다. 그래서 그런지 내 눈에는 과거 한국의 가부장적인 부부 관계 같이 여성이 모든 일을 다 하고 남성 눈치를 보는 듯해서 이채로웠다. 이곳에서도 얼굴만 잘 생기면 모든 것이 용서받는 듯하다.
주인은 우리에게 방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지금 이 기간이 에든버러의 그 유명한 페스티벌 기간이기 때문에 큰 길가에 접해 있는 우리 방에서 밤새 소음 때문에 잠을 자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주인의 충고대로 방을 옮기고 휴식을 취했다.
에든버러의 첫날은 모두 만족스러웠다. 특히 숙소와 집주인 그리고 그 여자친구까지 너무 친절해서 인상적이었다. 거기에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 유명한 에든버러 페스티벌 기간이라니...
이래저래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는 우리에게 큰 행운의 지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