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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나의 두려움 20240318

by 지금은

‘돼지 멱따는 소리라도 좋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애환일까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절뚝거리며 걷거나 지팡이에 의지하여서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움직일 수 없어 늘 누워 지내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방송국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아침마당을 보았습니다. 음치 탈출입니다. 노래 강사분들과 음치라 자처하는 몇 사람이 출연했습니다. 익히 눈에 익은 사람이 있고 처음 보는 이도 있습니다. 강사들의 모습은 밝고 음치라 자처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있습니다. 편을 가르지 않아도 우선 앉아있는 자세에서부터 면면이 엿보입니다. 손가락으로 짚어봅니다. 저 사람, 하나 건너 사람, 두 번째 줄 가운데 앉은 사람, 시간이 지나자, 나에게도 눈썰미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우선 나부터 이야기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노래를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소질이 없다고 하면 어떨까요, ‘음치’가 어울릴까. ‘박치(拍痴)’가 어울릴까. 나 스스로 진단하기에 박치에 더 점수를 주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음정이 잘 맞는 것도 아닙니다. 음정, 박자, 리듬이 엉망입니다. 관객이 되어 가수의 노래에 맞추어 손뼉을 치다 보면 느낍니다. 옆 사람과의 손뼉이 맞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엇박자를 하고 있어 당황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 음악 시간에 실기 시험을 본 일이 몇 번 있는데, 때때로 음이 맞지 않아 눈총을 받았습니다. 점수를 잘 주고 싶었던 선생님은 일주일이라는 연습 시간을 주었습니다. 음도 그렇지만 박자가 맞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 음악 시간에 쉰 목소리로 힘들게 소리를 냈습니다. 마음이 짠했는지 기본점수를 주셨습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회사에 다닐 때 동료들과 종종 노래방에 갔습니다. 모두 노래에 흥겨워할 때 나는 선곡 책자를 뒤적이며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키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 많은 노래 중에 나에게 맞는 곡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낯익은 동요를 부르면 좋겠지만 분위기를 흐를 것만 같은 생각에 외면했습니다.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어찌어찌 노래를 불렀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습니다. 침묵이 흐릅니다. 누군가 재빨리 분위기를 반전시킵니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얄미운 생각이 함께합니다.


노래 강사들은 음치들이 노래를 잘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합니다. 본업이 본업인지라 자신 있는 표정을 짓습니다. 드디어 자신 없어하는 사람이 한 사람씩 나와 실력을 선보이고 강사들 조언과 함께 실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노래에 맞는 음정, 박자, 리듬을 짚어줍니다. 지도의 효과가 보입니다. 잠깐의 시간이니 완벽하지는 않아도 좀 전에 비해 나아진 느낌이 확연합니다. 모든 게 그러하듯 배움도 필요하고 연습도 있어야 합니다. 강사들의 말에 의하면 노래를 배우기에는 음치보다 박치가 더 힘들다고 합니다. 나는 후자인데 하는 마음에 언짢아집니다. 노래도 그렇지만 악기를 다루다 보면 박자를 놓치는 때가 많습니다. 특히 못갖춘마디에서 실수합니다. 이것을 고쳐보려고 메트로놈을 찾아 활용해 본 때도 있습니다. 꾸준히 하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강사의 말에 의하면 많이 들어보고 많이 불러 봐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지도도 필요합니다. 삶의 과정이 그렇지 않습니까. 숙달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있어야겠습니다. 자주 불러보고 자신에 맞는 노래를 찾아보라고 합니다. 발성을 들어보고는 이에 어울리는 가수의 노래를 지목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잘 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때는 노래방 기기를 마련하면 어떨까 하기도 했지만 마음뿐이었습니다. 노래를 잘하려면 그만큼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보다 음악 감상에 이끌립니다.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방청객 중에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자신이 없는데 앞으로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노래를 잘하지 못한다고 주눅 들지 말 것. 노래로 돈을 버는 사람은 잘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크게 상심하지 말고 즐기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농담도 한마디 던집니다.


“노래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먹고사는 게 아니겠어요.”


회사에서 행사 곡이 연주될 때 지휘를 부탁했습니다. 생각 없이 무대에 올랐는데 크나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곡의 흐름과 내 손이 따로 놀았습니다. 최소한 미리 몇 차례 맞춰보아야 했습니다. 당황하자 몸이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박자감도 없는 사람이 지휘한다는 게 맞는 일이겠습니까.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부끄러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불합리한 조건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를 극복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부끄러움에 손을 들어 허공을 휘젓는 때가 있습니다. 거꾸로 가는 것은 아닌지, 허밍에 박자를 맞춰봅니다.

아직도 잘해보겠다는 일념은 남아있습니다.

'서너 곡쯤은 잘 불러야지 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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