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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탈출 20240318

by 지금은

코로나19가 끝났어도 이 겨울에는 삼식이(三食이)로 지냈습니다. 가끔 눈치를 봅니다. 설거지라도 할 량이면 아내는 슬그머니 다가와 나를 거실로 밀어냅니다. 맘에 들지 않는답니다. 고무장갑을 끼고 해야 하는데 맨손으로 한다고 타박합니다. 주부습진을 염려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장갑을 끼면 어색한 감이 들고 그릇이 깨끗이 닦이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어쩌겠습니까. 빨리 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외출할 기회가 생기는 겁니다. 도서관, 복지관. 평생학습관 등에서 평생학습 강좌가 열립니다. 두 강좌를 듣고 있습니다. 하나는 비대면이니 집에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강의를 듣지만, 한 강좌는 대면 수업이라서 아침을 먹자마자 가방을 메고 나섭니다.


한 달 전입니다. 가산 디지털단지역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요즘 혼자 산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음식 타박을 하자 아내가 아이를 돌본다는 핑계를 대며 딸네 집으로 가버렸답니다. 말로는 혼자 있으니 세상 편하다고 하지만 왠지 그늘이 있어 보입니다. 어제저녁 술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아침을 생략하고 왔답니다. 농담 삼아 아내에게 잘못했다고 빌라고 했더니만 걱정 말라는 투입니다. 등산을 자주 하다 보니 식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이렇게 저렇게 기본적인 음식은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칩니다. 보란 듯 아내가 있을 때보다 음식을 더 잘 챙길 거랍니다. 허풍선이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커피숍으로 갈 때입니다. 골목길의 슈퍼 밖 구석에서 한 늙은이가 컵라면을 먹고 있습니다. 쪼그려 앉아있는 모습이 초라해 보입니다. 왠지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아내에게 쫓겨난 것은 아닌지, 아니면 피해 나온 것은 아닌지, 그도 저도 아니면 독거노인인지 모르겠습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식사를 아내에게만 매달려야겠습니까. 퇴직을 하고 몇 차례 부부 동반으로 음식 만들기에 참여했습니다. 쉽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샌드위치, 채소와 고기를 곁들인 샐러드 만들기, 미역국 끓이기, 오믈렛 만들기 등입니다. 즉석에서 만들어 시식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나요, 보이지 않는 경력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는 저녁 식사를 책임졌습니다. 잘하지는 못해도 밥과 국을 끓이고 몇 가지 반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취는 아니고 어머니가 집안의 경제를 책임졌으니 장사를 하시느라 아침에 밖에 나가시면 항상 밤늦게 돌아오셨습니다. 다음으로는 직장 생활 중 섬에서 몇 년간 홀로 자취를 한 때가 있습니다. 기본적인 거야 아내가 챙겨주었지만 섬에서 나는 식재료를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손을 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홀로 살게 되어도 식생활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내가 중국 여행을 떠났을 때입니다. 한동안 집을 비우니 걱정이라고 했지만 잘 다녀오기나 하라고 했습니다. 외식 한번 없이 열흘 동안 아들과 끼니를 잘 해결했습니다. 요즘은 예전과는 달리 다양한 식재료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반은 조리되어 나오는 식품이 많습니다. 고맙게도 조리를 도와주는 설명서까지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일일이 식재료를 씻고 다듬고 자르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경제만 허락한다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았더니 로봇이 라면을 끓여 손님에게 대접합니다. 입맛에 맞는다며 신기해합니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완제품이 시중에 널려있습니다. 앞으로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말 하나만으로도 음식이 내 앞에 차려지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편리함을 추구합니다. 좋기는 하지만 규격화는 맛의 갈래나 낭만이 줄어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수고로움을 덜까요. 일정량, 일정한 맛은 사람들을 식상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음식을 만드는 일이 때로는 귀찮고 번잡스럽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다름은 또 다른 생각의 세계로 우리를 이끕니다. 오늘은 아내가 볼일이 있답니다. 식사 준비를 해놓지 않아서 어쩌면 좋으냐고 걱정합니다. 집을 나서며 때가 되면 외식하는 게 어떠냐고 운을 띄웠습니다. 잘 다녀오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책에 빠지다 보니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고 냄비를 꺼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저것 보입니다. 500밀리의 물, 생각에 많아 보입니다. 300밀리만 부었습니다. 수프는 반만 넣었습니다.


라면에 단호박 몇 쪽, 어묵, 파와 양파를 넣었습니다. 나중에 쑥갓을 몇 줄기 넣고 김 부스러기도 고명대신 얹었습니다. 뭡니까. 입이 즐거웠습니다. 메뉴 하나 개발입니다. 가끔 나를 위해 아내를 탈출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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