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39. 서리꽃 20200206

by 지금은

‘엊그제가 입춘, 어제가 정월대보름’


많은 사람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붉음을 자랑하던 고추 같던 추위가 주춤했습니다. 성깔을 부리던 날카로움이 이대로 물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제는 공을 차다가 모처럼 겉옷을 벗었습니다. 영상의 기온을 맛봅니다. 모처럼 등의 열기와 축축함을 느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한 겹을 더 벗고 싶었지만 그만두었습니다. 반소매를 입은 모습이 남들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생각처럼 포근한 날씨입니다. 창밖을 보니 일찍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잦습니다.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을 했습니다. 공원을 지나다 넓은 잔디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낯선 느낌입니다. 잔디가 햇살에 반짝입니다.


‘뭐야, 별이라도 된 거야. 아니면 반딧불이라도.’


가던 길을 잠시 멈췄습니다.


‘아, 서리가 내렸군요!’


된서리임에도 추위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동안 강추위에 몸이 적응하였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서리에 빠졌습니다. 잔디밭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바퀴 돌았습니다. 천천히 이것저것을 살핍니다.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찾는 느낌입니다. 잔디에 맺힌 서리, 돌에 내린 서리, 벤치에 달라붙은 서리, 나름대로 그림이 다릅니다. 서리꽃을 피웠습니다. 곱다는 생각에 손가락을 가져갔습니다. 따스함과는 달리 차가움이 묻어나옵니다.


‘서리가 차가운 줄을 모르나.’


내 하얀 눈썹까지도 서늘해지는 느낌입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잠시 혼동을 일으켰나 봅니다.


발길을 서두릅니다. 늦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는 경우가 없는 분이 오늘은······.”


“서리에 취했지 뭡니까.”


이런 말을 하기가 싫었습니다. 종종걸음을 쳤습니다. 역에 도착하니 어느새 목덜미에 땀이 배어 나오는 느낌입니다.


‘그때는 정말 추웠다니까요.’


서리가 내린 날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세수하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밤새 된서리가 내렸습니다. 몸이 으스스합니다. 몸이 부르르 떨립니다. 오줌을 누면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늦가을 호된 서리입니다. 세수하는 둥 마는 둥 눈과 코에 물만 찍어 발랐습니다. 책보자기를 둘러메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지붕 위가 새하얗습니다. 박의 줄기와 잎이 힘을 잃었습니다. 담장의 호박잎과 줄기도 후줄근합니다. 텃밭의 배추가 하얀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길가의 논두렁이 흰 띠를 둘렀습니다.


“춥지?”


“말이라고 하냐.”


맨발에 검정 고무신입니다. 팔짱을 끼고 발을 동동 구르자, 나머지 아이들도 같이 동동거립니다.


“뛰어가자.”


육 학년 형의 말에 뒤를 따랐습니다. 달캉달캉 필통 속의 식구들이 함께 뜁니다. 허연 입김이 앞서갑니다.


“상강이 지난 지 보름이나 된 거 알지?”


절기를 잘 따지는 형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된서리가 내린 것은 그동안 하늘이 참았기 때문이랍니다. 아직 갈무리를 다 못해서 하느님이 봐주셨습니다. 이제는 게으른 사람을 더는 못 봐주겠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등교합니다. 그러고 보니 겨울방학이 끝났습니다. 집안에서 아침 생활을 하다 보니 예나 지금이나 이른 등교 시간이 춥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아이들보다 더 씩씩합니다. 전철역으로 향하는 중학교 옆길을 모범이라도 되는 양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습니다.


서리는 늦가을에만 내리는 게 아닙니다. 늦은 봄에도 내립니다. 입춘 절기인 봄의 시작점에서 서리가 내린 것을 보면 동장군의 힘이 약해졌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갑자기 배추 뿌리 생각이 납니다. 요즘은 구경할 수 없지만 상강이나 입동 무렵이면 김장하기 위해 배추를 뽑습니다. 간식이 변변하지 않던 시절이고 보니 주전부리로 제격입니다. 그때의 배추 뿌리는 큰 것이 자그마한 당근 뿌리만 했습니다.


“무 먹을래, 배추 뿌리 먹을래?”


“배추 뿌리요.”


입맛을 다십니다. 그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기지개를 켭니다. 왜 되지도 않는 배추 뿌리 생각은……. 가을과는 거리가 멀지만, 서리를 보니 그렇다는 거지요. 서리꽃 몇 번이면 봄꽃을 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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