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다리 밑에서 20240719

by 지금은

장마가 주춤하고 남쪽으로 물러나는 사이에 미뤄둔 볼일을 보았습니다. 외식하고 돌아오는 데 다리 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여보, 잠시 더위를 식히고 갑시다.”


아내의 말에 대답 대신 다리 밑에서 멈췄습니다.


공원의 수로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중앙선에 작은 꽃나무들을 품은 4차선 도로 아래입니다. 일반 다리에 비해 폭이 넓다고 해야겠습니다. 아내는 빨리 평상을 맡아 놓으라며 손짓하더니 가까이 있는 상가 건물을 향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말대로 자리를 맡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했지만, 평일이라서인지 아니면 막 점심시간을 넘긴 시간 때문인지 평상은 텅 비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자리를 골라 앉았습니다.


잠시 시간이 지났지만,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짐작하건대 뭔가 먹을 것을 사 오려나 봅니다. 아니면 화장실이 급했을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더운 날에는 야외의 장소로 다리 밑만 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전과는 달리 시원한 바람이 물길을 타고 나에게 다가옵니다.


“너,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것 알아.”


어느 궂은 저녁입니다. 먹장구름이 온 동네를 덮었습니다. 막 낮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고 있을 때입니다. 삼촌이 내 머리를 툭 건드리며 한 말입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들리는 말의 느낌이 이상합니다. 방안을 돌아보았지만 잠들기 전까지 보이던 식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삼촌 혼자입니다.


“엄마는?”


“엄마가 어디 있어. 형 엄마가 너 불쌍하다고 엄마처럼 돌봐준 거지.”


“할머니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야. 할머니는 우리 어머니인데 뭘.”


기억으로는 네댓 살 무렵이 아닐까 합니다. 어둠이 내리는 저녁입니다. 이 날따라 하늘이 잔뜩 흐려 있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자 뜬금없이 삼촌이 내뱉은 말입니다. 나중에야 장난임을 알았지만, 한동안 나는 이 집 식구가 아니라는 생각에 머리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놀려주려고 무심코 한 말이지만 나에게 그 후유증은 컸습니다. 가출을 생각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이후에도 어른들이 아이들을 놀려주려고 가끔 하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결코 이런 말장난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손에 음료수가 한 컵 들려있습니다.


“사람은 둘인데 컵은 하나야.”


시원한 음료를 사려고 했는데 실수로 뜨거운 것을 가져오게 되었답니다. 자신은 먹을 마음이 없었지만 내가 물을 자주 마시는 것을 알기에 생각해서 가져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컵을 받아서 들었습니다. 손의 감각이 뜨겁게 느껴집니다. 뚜껑을 열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음료수를 마실 때 차가운 것을 싫어합니다. 요즘처럼 더위를 느끼는 날에도 커피를 마신다면 뜨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배앓이가 심했던 나는 늘 따뜻한 것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차가운 음료를 주문할라치면 손사래를 칩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알면서 뭘 그래.”


한 모금 마십니다. 아직 식지 않아 뜨겁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요 며칠 사이 내 몸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더위를 먹은 것은 아니지만 체중이 줄어들고 행동이 느려짐을 느낍니다. 늘 하는 대로 새벽에 40여 분간을 운동하는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에 그저께는 30분, 어제는 20분으로 줄여봤습니다. 운동의 강도도 약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몸의 상태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세수하다가 입술의 느낌이 이상해서 거울을 봤더니 좁쌀알만큼 부풀어 올랐습니다. 일상의 변화가 없고 특히 힘든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순간적으로 몹시 덥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입니다.

아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평상에 누웠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몸을 감싸고돌다 달아나고 대신 새 바람이 내 주위를 감돕니다. 눈이 스르르 감깁니다. 어느새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이래서 다리 밑이 좋은지도 모릅니다. 꿈을 꾸었을까요. 새 바람이 찾아왔기 때문일까요. 퍼뜩 놀라 깨어 일어났습니다.


“엄마는…….”


“이왕 눈감은 걸 좀 더 있지 않고.”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알맞게 식어 나를 기다린 모양입니다. 두 모금 마셨습니다.


“마시기 좋을 만큼 식었네.”


아내가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러게.”


아내 옆에 다시 누웠습니다.


오랜만에 다리 밑에서 느껴보는 고향의 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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