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읽지 마세요. 20241109

by 지금은

엊그제 일입니다. 글쓰기 프로그램 강의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강사가 책을 내밀었습니다. 나는 엉겁결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강의 첫날입니다.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수강생에게는 선물이 있다고 했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동안 잊고 지냈습니다.


책을 받아 들자 그분이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그냥 보기만 하고 읽지는 마세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날입니다. 서울 구경을 하고 싶어 가방을 챙겼습니다. 오늘은 무슨 책을 넣어가지고 갈지 망설이다가 엊그제 받은 책을 책장에서 꺼냈습니다. 보기만 하고 읽지 말라는 말이 왠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 그의 말 그대로 겉장만 훑어보고 말았습니다. 표지가 단순하지만, 디자인이 고급스럽다고 느껴졌습니다.


나는 차를 타면 대부분의 시간을 책과 함께합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지만 어느덧 습관이 되었습니다. 특히 전철을 타면 책을 읽기를 좋아합니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비교적 조용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인들처럼 복잡한 시간에 출퇴근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한적한 시간에 차에 오릅니다. 더구나 경로석은 쉽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크게 남의 눈치를 볼 일이 없습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어느덧 백발의 머리와 주름진 얼굴은 다른 사람의 눈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요즘 노인의 연령을 재조정해야 한다며 적정 나이를 들먹이지만 그래도 그 나이를 넘겼습니다. 가끔 스스로 노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남들이 노인 취급을 할 때면 왠지 서운한 감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몸놀림이 재빠르지는 못해도 마음은 아직 젊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며칠 전 서울에 갔을 때 일입니다. 아내와 고궁을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밖으로 나왔지만, 나들이객들이 뒤엉켜 혼잡을 이룹니다. 음식점마다 만원입니다. 미처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이곳저곳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어느새 골목을 몇이나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두리번거리던 아내가 배고프다며 말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몇 안 되니 여기서 식사하는 게 어때요.”


“자리가 나려면 십여 분은 기다리셔야겠어요.”


종업원이 한쪽의 의자를 가리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자리에 앉자, 무의식적으로 책을 꺼냈습니다. 전철에서 읽던 책입니다. 보기만 하고 읽지 않는 게 좋겠다는 그의 말이 궁금해서 차에 오르자마자 꺼내 들었는데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슬금슬금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시집입니다. 내용이 쉬워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보기만 하고 읽지 마라.’


그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읽는 내내 그림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슨 그림을 보고 있을까요. 어릴 때 고향의 풍경과 내 모습을 본다는 마음입니다. 말하듯 흘러가는 구절이 하나씩 가슴에 안기며 그 시절 보아왔던 그림을 떠올립니다. 십여 분을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십여 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시간이 흘렀는지 모릅니다.


식탁에 앉아 물을 마시는데 종업원이 말합니다.


“저의 업소는 키오스크를 사용합니다. 어르신이 주문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작을 해보시고 안 되면 말씀하세요. 도와드리겠습니다.”


“예.”


그가 내 얼굴을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어르신이 하기에는 어렵겠지요.”


“…….”


아내와 말을 주고받으며 키오스크의 버튼을 순서에 따라 눌렀습니다. 주문이 끝나자 다 읽지 못한 내용이 궁금합니다. 음식이 만들어지는 동안 시집을 펼쳐 들었습니다. 종업원의 시선이 눈에 들어옵니다. 옆 테이블의 사람이 곁눈질합니다. 이상하다는 뜻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도 음식점에서 책을 펼쳐 든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궁금한걸, 어쩌겠습니까. 두껍지 않은 시집인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다 읽지 못했습니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자꾸만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책 읽는 즐거움에 퐁당 빠졌습니다. 아니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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