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입양 20230219
‘만남’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만남 속에 살아갑니다. 바람이 스쳐 가듯, 태양이 떠오르듯 만남의 연속일 경우가 있습니다. 일식이나 월식처럼 수년에 걸쳐 몇 번의 만남이 있습니다. 또는 단 한 번의 만남, 아니 그 이하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이 중 특별한 만남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이산가족 찾기’ 특별한 만남입니다. 6.25라는 동족상쟁이 빚어낸 결과로 행사가 시작되는 동안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중에는 전쟁고아로 이역만리타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일가친척을 만난 사람도 있고, 이웃 고장에 살면서도 모르고 지내다가 만남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겼으니, 개인의 이야기를 해봐야겠습니다.
“언니 맞지요?”
“얼굴이 똑같기는 한데…….”
언니는 형제자매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젖먹이 시절 가정형편이 너무 어렵다 보니 부모는 한입이라도 줄여볼 요량으로 타지방의 부잣집으로 입양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쌍둥이 자매의 동생을 보고 놀랐습니다.
“청주에 사시던 분 아니에요. 여기는 어떻게…….”
“아닙니다. 영천에 살았어요.”
“이상하다, 틀림없는데.”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생을 언니로 착각하고 물었습니다.
그 후 동생은 쌍둥이 언니가 있다는 말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습니다. 환자를 통해 연락이 닿았습니다. 입양 사실을 모르는 언니는 확신을 얻고자 유전자 감식을 했고 드디어 자매임이 밝혀졌습니다. 부잣집으로 알고 입양되었지만, 말과는 달라 초등학교 입학은 고사하고 그동안 모진 고생을 하며 외롭게 지냈다고 합니다. 무남독녀로만 알았던 언니는 많은 가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입양은 전쟁의 결과이기도 하고 가난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또는 부부 사이의 불화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고 사연은 다양합니다. 입양은 좋은 결과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위의 경우처럼 상처만 남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가정에 입양되면 대부분 순조로운 삶이 이어지지만 그렇지 못하고 파양이 되거나 버림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며칠 전 TV를 통해 해외에 입양되었던 고아가 성장하여 친부모를 애타게 찾는다는 사연을 보았습니다. 꼭 찾기를 기원했지만 쉽지 않다며 제보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친부모를 찾을 정도라면 양부모의 알뜰한 보살핌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양부모를 찾는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경우의 짧은 순간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어느 날 집에 오신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너 외국에 가지 않을래? 부잣집에 가서 잘 살 수 있는데.”
친척 할머니가 동두천 미군기지 내에서 장사하고 계셨는데 일손이 부족하다고 할머니를 모셔갔습니다.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니 한 입이라도 덜겠다고 떠나셨습니다.
집안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과 상의가 되었나 봅니다. 내가 머리를 끄덕이면 보낼 의향입니다. 양부모가 될 사람은 미국인으로 대령이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교수라고 합니다.
“며칠만 생각해 봐, 매일 맛있는 것 먹고 공부도 대학가지 보낸다고 다짐했으니까.”
은근히 입양되기를 바라는 할머니를 보며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는 늘 외톨이였습니다.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니 어느 곳에서나 혼자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별말이 없는 내가 외국말이라고는 주워들은 ‘고맙습니다’ 밖에 몰라 영원히 벙어리가 되면 어쩌냐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코배기는 밥을 먹지 않는다는데, 매일 배가 아픈 나는…….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때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입양을 결정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넓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내가 기관차 승무원에서 직업을 바꾸어 교사가 되었던 것 그리고 잠시 도서관에서 사서로 머물렀던 것. 궁금증은 풀렸지만, 아직도 어느 것이 더 좋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다만 가보지 않은 길이 더 좋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상상의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할머니가 동두천으로 떠나시는 날 나에게 물으셨습니다.
“가기로 했니?”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