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80. 무게와 크기 20230319

by 지금은

‘투덕투덕…….’

공을 찹니다. 어제의 공과 다릅니다. 크기가 다르고 무게가 다릅니다.

‘탱글탱글 탱그르르.’

벽에 부딪혀 통통 튀다가 또르르르 굴러옵니다.

어제의 공은 텅하고 벽에 부딪혔습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일직선으로 내 발을 향해 달려옵니다. 어제의 공은 축구공이고 오늘의 공은 겉 거죽이 벗겨진 배구공입니다. 속살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두꺼운 피부가 벗겨진 모습은 풍선을 연상시킵니다. 아직도 본래의 둥근 모습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로 축구공을 차고 있지만 가끔 가죽이 벗겨진 탱탱볼과 외피가 닳아빠진 스펀지 공도 찹니다. 찰 때마다 차이를 느낍니다. 축구공과 탱탱볼은 내 발길질에도 크기와 모양이 그대로인데 스펀지 공은 바닥에 쓸리며 처음과는 달리 크기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군데군데 흠집이 나고 뜯겨나간 곳이 있었는데 이제는 매끄러운 얼굴입니다. 마맛자국이 있는 얼굴을 피부과에서 성형이라도 한 듯 곱습니다. 거친 나무 바닥에 쓸리면서 낡아 보이던 표면의 색이 밝아졌습니다.

탱탱볼은 잿빛 피부인데 요즘은 검은 피부로 변했습니다. 바닥에 미끄럼을 타는 동안 마찰에 의해 쓸렸기 때문인지 검은빛이 납니다. 햇빛을 받으면 광을 낸 구두의 코끝처럼 반짝입니다. 탱탱탱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통통 튀어 오르기도 합니다.

둔탁한 축구공은 무게감이 있습니다. 벽을 때리고 되돌아올 때마다 거침이 없습니다. ‘텅’ 하면 곧 내 발 앞으로 힘차게 머리를 들이댑니다. 내 발끝에서 떠날 때도 ‘텅’ 소리와 함께 벽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미끄러지고 긁히는 동안 때가 묻었습니다. 매끄럽던 피부가 마냥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린 날입니다. 내 발끝에서 놀더니만 모습이 말이 아닙니다. 그냥 보아줄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욕실에 가서 샤워시켰습니다. 내가 목욕이라도 한 듯 내 눈이 상쾌했습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공은 서서히 긁히고 먼지를 뒤집어씁니다. 주름 사이로 검은 때가 낍니다.

공을 규칙적으로 찬 지도 어느새 반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주먹 크기의 공을 찼습니다. 부드러운 공입니다. 며칠 차다 보니 성에 차지 않습니다. 가볍기도 하려니와 작아서 발에서 미끄러지기도 하고 닿는 촉감이 좋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버려진 공을 발견했습니다. 스펀지 공입니다. 내가 공원의 마른 풀숲에서 발견했을 때는 눈 위에 덩그러니 누워있었습니다. 추위에 꽁꽁 얼었습니다. 주워 드는 모난 돌에 얹혀있던 공은 순간 살점을 뜯겼습니다. 엄지발톱만큼 뜯겨나갔습니다. 반발력은 작지만 작은 공보다는 가지고 놀기에 좋은 느낌입니다. 좀 초라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차는 동안에 겉의 표면이 닳아지면서 칙칙하던 겉모습은 밝게 변했습니다. 흠이라면 생각보다 크기가 많이 줄었습니다.

탱탱볼도 나의 품으로 찾아온 이유는 이와 유사합니다. 누군가 길가에 버렸습니다. 거죽은 보이지 않고 속살은 가는 실오라기가 감싸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바닥에 튀겨보니 잘 튀어 오릅니다. 먼지에 감싸인 실을 풀어냈습니다. 재색의 속살이 드러났습니다. 실까지 벗겨내니 모습이 완전히 변모했습니다. 재색도 검은색도 아닌 탱탱볼입니다. 아직도 발에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내 몸동작이 불편하도록 불규칙하게 튀어 오릅니다. 내 발과 친하게 놀지 않아 버릴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더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익숙해질 때가 있겠지. 불규칙한 통통거림이 내 몸의 동작을 조금은 유연하게 해주지 않을까 합니다.

축구공은 광의 한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배가 불렀는지 어느 순간 공기를 토해냈습니다. 겉은 멀쩡하기에 버리기가 아깝다는 생각에 나중에 화분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몸통을 일부 오려내면 멋진 모습으로 식물을 안을 수 있습니다. 한때의 내 경험입니다. 학교에 있을 때 학생들의 호기심에 답했습니다.

“폐품을 재활용하는 거 알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바람을 넣었습니다. 처음처럼 배가 솟아올랐습니다. 기다려 준 보람이 있습니다. 제구실하고 있습니다.

요즘 공을 차면서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수많은 것들은 각자 제 역할이 있게 마련입니다. 거실에는 스트레칭하기 위해 장만한 한 아름 되는 짐볼이 있습니다. 무겁지는 않습니다. 깔고 앉으면 의자처럼 앉을 수도 있습니다. 무게는 축구공과 별 차이가 나지 않지만, 발로 차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멀리 달아나지 않습니다. 발로 차기에는 영 아닙니다. 각자의 길이 있습니다. 공의 예만 들어보아도 그렇습니다. 축구, 배구, 야구, 농구, 테니스, 골프 등에 쓰는 공들 그 역할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고 보면 물건의 무게와 크기, 모양이 중요하듯 우리의 삶도 각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축구공이 생명을 다하면 버려지겠지만 때로는 화분으로 쓰였듯 다음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한때 학생이었고, 기관차 승무원, 교사, 사서교사, 봉사자, 지금은 직업군에서 벗어나 독서와 글쓰기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몸이 다 하는 날까지는 큰 변화든 작은 변화든 달라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욕심인지 모르지만 아직은 역할이 있을까 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립니다.

갑자기 주전자가 생각나는 이유는 뭐지. 물, 간장, 술, 차, 식초……. 내 마음의 그릇에 뭐라도 담아보고 싶습니다.

“멋져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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