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현충일 20230606
할머니는 그날도 변함없이 옷을 갈아입으셨습니다. 곱게 모셔둔 옷, 외출 때나 입는 흰 저고리에 흰 치마입니다.
내가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깨어났습니다. 얼마나 잤을까 한밤중입니다. 달빛이 어스름하게 지붕에 걸렸습니다. 오줌이 마려워 밖으로 나왔을 때 할머니는 물동이를 이고 사립문을 나섰습니다. 나는 먹을 물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볼일을 보고 댓돌에 앉았습니다.
“더 자야지, 목이 마른 게야?”
할머니가 물동이를 내려놓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할머니는 하얀 사기대접에 동이의 물을 떠서 뒤꼍으로 가셨습니다. 내 눈이 조심스레 할머니를 따랐습니다. 할머니는 장독대 위에 물그릇을 놓고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칠성님께 비나이다. 우리 아들…….”
대접 속으로 달이 내렸습니다. 파르라니 서늘한 달빛입니다. 할머니가 정화수를 들고 일어설 때 나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도 이 시간이면 할머니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전선에 나가 있는 아들의 무사 귀환을 위한 기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의 치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선에 나가 있던 두 아들은 6·25 전쟁이 끝나고 나서 얼 “어머니의 지극정성이 보답한 거야.”
우리 집과는 달리 다른 가정의 경우 전쟁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전쟁 통에 죽거나 다쳤습니다. 나라 전체로 보면 다 같이 불행한 시기를 보내야 했고 그 후유증은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아직도 상처의 끝은 아물지 않았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내 휴대전화에 문자의 알림이 이어집니다. 현충일을 맞아 서로를 위로하고 과거를 되새기는 내용들입니다. 이제 참전 용사들은 한 분 두 분 세상을 달리하여 생존해 있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나의 삼촌 두 분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떨어져 살다 보니 전쟁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나 책을 통해 참상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전쟁에 참여할 나이가 되지 못해 경험은 없지만 전쟁 후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민군 패잔병의 모습, 무장 공비의 출현, 간첩의 침투 등은 한동안 우리를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아침 일찍 글쓰기를 함께 하는 동료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귀에 익숙한 노래입니다. ‘전선야곡, 휴전선, 한 많은 대동강’입니다. 부른 사람이 생소합니다. 내용을 듣고 보니 유엔군 참전용사의 손녀입니다. 평소에 손녀는 할아버지의 전쟁이야기를 많이 들었나 봅니다. 비교적 상흔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잿더미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우리나라를 보며 할아버지는 도움을 주기를 잘했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나라, 언젠가는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하던 할아버지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작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우리는 수년 전부터 보답의 하나로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여 나라의 발전상을 알리고 위로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분명 소녀의 할아버지도 초대의 대상이 되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다만 순서에서 뒤로 밀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할아버지가 평소에 듣고 부르던 노래, 할아버지가 그리워 우리의 말과 글을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성진 노랫소리는 마음을 시리게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국의 아가씨 목청에 맞추어 불러보았습니다. 치성을 드리는 할머니의 모습이 앞으로 다가와 울컥하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마 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삼촌에게 말했습니다.
작년부터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살펴보면 싸움을 시작한 이유가 있지만 국가든 개인이든 폭력에 의한 지배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전쟁을 겪어본 나라로 그 결과의 참혹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남북한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만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입장입니다. 이는 힘의 논리에 의해 언제든 깨질 수 있습니다. 힘이 없는 평화는 없습니다. 약한 자가 베풀 수 있는 용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한 군대와 튼튼한 경제력만이 나라를 평화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웃 나라들이 우리의 존재를 높이 평가할 수 있도록 꾸준한 노력을 지속해야겠습니다. 강자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