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어울림 20230821
“갑자기 덥지.”
아내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부스럭거립니다. 요즘 열대야가 지속되고 있지만 덥다는 이유로 잠에서 깨는 일은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나는 밤중에 종종 눈을 뜹니다. 선풍기를 틀었습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거야.”
“그렇지는 않은데 덥네.”
아침밥을 먹자, 더위가 햇살을 몰고 창문을 넘어 나를 향해 달려듭니다. 갑자기 열기가 느껴집니다. 세수했지만 안 되겠다 싶습니다. 이럴 때는 재빨리 피해야 합니다. 옷을 갈아입자, 아내는 낌새를 알아차렸습니다. 같이 나가자고 했지만, 손사래를 칩니다. 할 일이 있답니다. 밤과는 달리 괜찮다고 합니다.
혼자 복지관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나갔습니다.
‘뭐야, 아직도 영산홍이 꽃을 달고 있는 거야.’
작은 꽃들이 머리 위에 촘촘히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으니, 별일이 다 생긴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 공원의 장미원을 지나칠 때입니다. 꽃이 다 졌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드문드문 자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좀 초라해 보이기는 해도 이 더위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됩니다. 지난해 초겨울에 활짝 핀 몇 줄기의 개나리 생각이 나서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신기한 생각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영산홍의 꽃잎과는 사뭇 달라 보입니다. 그렇군요, 영산홍꽃이 분명 아닙니다. 둘레둘레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배롱나무의 꽃입니다.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먼저 핀 배롱나무의 꽃이 서서히 낙하했습니다. 영산홍 머리 위에 함박눈처럼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겠지.’
배롱나무의 말에 대답은 없지만 거부하는 몸짓이 아니고 보면 서로의 느낌이 통했다고 여겨집니다. 배롱나무는 자신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나 봅니다. 영산홍이 꽃덩이로 주변을 물들일 때 제 혼자 쓸쓸했습니다. 봄이지만 아직도 잎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볼 때 자신만 계절을 읽지 못한다는 마음에 속이 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배롱나무는 영산홍에서 힘을 얻었을지 모릅니다. 앙상한 몸으로 겨울을 함께 견뎠습니다. 영산홍의 화려한 모습에서 나도 하는 마음이 솟아났으리라고 믿습니다. 용기를 준 너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산홍과 배롱나무의 이야기를 했으니, 식물에 관해 이야기를 덧붙여 보겠습니다. 앞선 내 생각처럼 식물들이 사이가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동물처럼 식물도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는 생존을 위한 일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내 고향의 산에는 진달래가 지천이었습니다. 지금은 봄이 되어도 꽃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수풀이 우거지면서 큰 나무들이 산을 뒤덮자, 작은 나무들은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사그라지고 말았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키 작은 나무들은 설 곳을 잃었습니다. 대신 음지 식물이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큰키나무라고 해서 그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동종끼리도 햇빛을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합니다. 몸집을 불리며 키를 키우고 옆의 나무를 밀어냅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약한 나무는 설 자리를 잃고 빈약한 삶을 이어가다 사라집니다. 식물에도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나무에 붙어 영양을 빼앗아 갑니다. 그 예가 겨우살이입니다. 겨우살이는 나무의 높은 줄기에 기생하여 겨울을 납니다. 그 밖에도 칡이 있습니다. 칡은 큰 나무를 감고 올라가며 잎을 피웁니다. 이런 까닭에 햇빛이 필요한 나무는 칡잎에 가려 종래는 생명을 잃고 맙니다. 이렇듯 식물이라고 해서 마냥 순한 것만은 아닙니다.
생각은 자유입니다. 세상에는 하고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와 진딧물’, ‘악어와 악어새’, 공생관계입니다. ‘여우와 두루미’, ‘지내와 뱀’ 적대관계입니다. 나는 한동안 이솝우화에 빠진 때가 있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생물, 상대에게 도움을 받는 생물, 해를 끼치며 살아가는 생물도 있습니다. 이는 모두에게 그런 것만은 아니고 상대적입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모두에게 나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내가 휴게실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온 분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소리가 큽니다. 크기를 낮춰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선 듯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휴게실입니다. 시끄럽다고 여겼지만, 생각에 빠져들다 보니 잊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조용함을 알아차렸습니다. 텔레비전의 소리가 낮습니다. 몇몇 사람은 신문과 잡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작은 배려가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머리 위로 꽃이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