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편지 20230906
더위가 물러나지 않았어도 가을입니다. 나뭇잎이 태양의 눈치를 보며 변색을 준비합니다. 새하얀 구름이 하늘에 찾아와 제 모습을 뽐냅니다. 나의 눈은 더위에 찌들어 해와 눈을 마주치기를 싫어했는데 어느새 슬금슬금 하늘을 향합니다. 볼거리가 늘었습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가녀린 여가수의 애잔한 목소리를 기억합니다. 오래전에 즐겨 듣던 노래이지만 지금도 애잔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평생학습관에서 편지에 대한 강의가 있다기에 신청했습니다. 강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용케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수강생의 편지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마음이 솔깃했습니다. 올해는 책과 인연이 깊어서인지 내 글이 있는 것을 몇 권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전하게 나 혼자 엮은 그림책, 밤새워 쓰는 한 꼭지의 글을 모은 책, 편지글 한 장이 실린 책, 아니 어쩌면 이 해 안으로 또 한 권의 그림책을 마련할지 모르겠습니다. 복지관에서 그림책을 만든다기에 재미를 붙여 또 신청했는데 완성된 책이 될지 아직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누군가 책을 만들어 준다는 건 기분이 좋은 일입니다. 많은 글을 써 놓고 책을 만들까 생각했지만, 자비를 들이기에는 가치가 있을지 망설여집니다.
각 기관에서 내가 쓴 내용을 가지고 책 한 권씩 만들어 주겠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그동안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가운데, 내 이름을 앞세워 한 꼭지씩 실은 책이 해마다 출판되어 몇 권이 됩니다. 온전히 내 글, 그림이 실린 것은 네 권입니다. 어린이가 볼 수 있는 그림책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뭐 하나 하는 생각에 몸을 움직인 결과입니다. 이곳저곳 배움터를 기웃거리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평소에 생각지 않았던 편지글을 써야 한다니 그동안 멀리했던 편지쓰기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리 준비해야겠습니다. 이왕이면 천편일률적인 내용이나 형식보다는 다른 느낌이 드는 내용이면 좋겠습니다. 남다른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 어제는 한밤중에 음악을 듣다가 편지의 노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최양숙의 ‘가을 편지’입니다.
‘편지, 편지라…….’
젊어서부터 편지의 노래라면 ‘가을 편지’만 들었는데 다른 노래의 편지도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했습니다. 의외로 여러 곡이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늘 즐겨 듣던 ‘가을 편지’와 ‘이등병의 편지’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 가을에 듣기에는 다소 쓸쓸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분위기에 어울리는 가사와 곡입니다. 이와 분위기가 다른 곡도 있습니다.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경쾌하고 발랄한 노래입니다. 이런 노래의 편지도 있었다니……. 신세대가 부른 곡입니다. 가사의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잠시 쓸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무릎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가사의 내용을 내 맘대로 바꿔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외국 가수가 부른 ‘편지에 관한 노래’도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가을엔 멋진 편지를 한 편 써야 합니다. 오랫동안 쓰지 못한 편지의 공간을 메워야겠습니다. 다시 ‘편지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을 한 사람씩 들춰내어 들어봅니다. 주방에서 저녁을 하던 아내가 흥얼거립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그래도 그 시절에는 좋은 가수가 많았는데.”
나이를 견주어 보니 그들과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시절이었습니다. 가수와 우리의 나이가 서로 비슷했습니다. 젊음이라는 동질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 역시 아내가 말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차분하면서도 서정적인 느낌이 좋습니다.
오늘은 뜻하지 않은 수확이 있었습니다. 복지관에서 스마트 폰에 대한 강의를 듣는 첫 번째 수업입니다. 앞으로 몇 시간에 걸쳐 인공지능에 대해 강의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글과 사진, 그림 등을 찾고 내 생각에 맞게 고치고 편집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필요한 내용을 얻기 위해 질문을 하면 답을 해준답니다. 우선 글쓰기 중, 예를 들어 편지쓰기에 관해 말했습니다.
“생일을 맞이하여 아내나 남편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전달하면 좋겠지요.”
생각이 잘 나지 않으면 인공지능에 부탁하여 내용을 받으면 됩니다. 다음 그 내용을 내 마음에 맞게 수정하면 어려움을 덜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어서 그렇지, 편지뿐만 아니라 시, 수필, 소설 등도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쓸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럼 나는 뭐야.’
그동안 나는 글쓰기에 골머리를 썩이며 여기까지 왔는데……. 순간 야릇한 감정이 머리를 감쌉니다.
강사의 설명에 따라 연습으로 편지쓰기를 인공지능에 부탁했습니다. 전해준 내용을 보니 형식이며 내용이 그럴듯합니다. 아직은 마음에 썩 들지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생각이나 자료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는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삼 일간 편지에 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의 국군장병 위문편지, 방학 중 친구와 선생님께 보내는 안부 편지, 사춘기 여학생과의 펜팔, 군 훈련소에서 부모님께 올린 감사의 편지, 교직에 있을 때 방학이면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안부의 편지. 잊힌 편지가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제일 많이 쓴 손 편지는 아무래도 제자들에게 쓴 것이겠지요. 해마다 제자가 60명 이상이라 여름·겨울 방학을 합치면 적어도 100여 통을 쓴 셈입니다. 아이들의 특성이 다르니 내용도 달라야 합니다. 많은 손 편지에 가끔은 밤을 새운 일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때의 노력을 빌어 색다른 편지를 써볼까 합니다. 자료를 찾아가며 구상 중인데 마음같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잘 써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