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182. 가을에 쓰는 편지

by 지금은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 편지’ 노래를 듣다가 너를 마음속에 떠올렸다. 내 어머니를 늘 그리워하는 것처럼, 다음으로 네 모습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그 시절 그만큼 우리가 다정했다는 증거이겠지.

미사여구의 인사말은 생략하고, 그냥 잘살고 있겠지?

‘조화조’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헤어지기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걷던 마포에서 용산까지의 통학로. 그 길이 너와 나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까? 어느 날 네 생각에 시간을 내어 염천교 방향으로 걸어봤어. 이 길은 내 생각만큼 기억하고 있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걷던 때의 모습이 아니었거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벌써 얼마 만이야, 너와 나의 발걸음이 끊긴 지 60년을 넘긴 걸.

중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 너는 갑작스러운 작별을 전했어.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 이사하게 됐다고. 다음 날 일찍 너희 집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짐을 풀고 있었다.

“나쁜 놈”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 너는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거야.

수업 첫 시간이 끝날 때까지 망설이던 새내기 선생님은 우울한 표정으로 수업료를 내지 못한 학생의 이름을 부르고 집으로 돌려보냈지.

“교장 선생님 말씀이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수업료 가져오란다.”

그때 우리는 벌거벗은 남산으로 향했지. 집에 가봐야 뻔한 거 알잖아. 햇볕까지 마음을 따갑게 했어. 뒷말은 해서 뭐 하겠어. 속만 더 상하지.

“졸업 축하해.”

너는 고등학생 차림으로 꽃다발을 안고 내 앞에 불쑥 나타났지. 고맙다며 점심 함께 먹자는 우리 어머니의 말씀에, 회사에서 몰래 빠져나왔다면서 발길을 돌렸어. 어디에 사느냐, 어느 회사냐는 말에도 대답을 미루었다.

“시간을 내어 너희 집에 찾아갈게.”

하지만 만남의 끈을 놓치고 말았어. 곧 우리가 미아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잖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끔 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쪽지를 남겼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학업의 끈을 놓지 않겠다던 너, 회사의 배려로 야간학교에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지. 성실함이 너의 무기였기에 대학까지 가겠다던 큰 포부를 믿었다. 네 말은 내 삶에 큰 용기가 되었다.

“밤낮은 쉼 없이 바뀌는데 아직도 만남의 유효기간이 있기는 있는 게야.”

며칠 전 마포의 살던 곳을 다녀왔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내가 살던 집과 그 똥 고개가 아파트 숲으로 변해버렸어요.

발길을 돌리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 예전 KBS 이산가족 찾기에 신청했으면 어떠했을까.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너를 만나는 것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너를 만나지 못한 것처럼 지금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하고 많은 책 중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나를 괴롭힌다. 내용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하나하나 들춰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어린 왕자가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니 이와 반대일 수도 있겠다. 몇 번을 읽었어도 늘 새로운 세상을 여행하는 기분이야. 너 혹시 ‘어린 왕자’가 아닌지, 살아가는 목적은 같아도 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눈이 서로 다른지 모르겠다.

이제까지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삶을 살았겠지만, 어린 왕자처럼 이것저것 경험하는 가운데 더 성숙해졌으리라 생각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동화적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좋은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책을 좋아했던 너, 기회가 된다면 ‘어린 왕자’를 읽고 궁금증을 함께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이 밤에는 너를 그리며 몇몇 편지의 노래를 이어 들어야겠다.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이 가을엔 정말 편지를 쓰게 되었다. 몇십 년 만에 쓰는 손 편지. 그것도 나의 어머니가 아닌 너에게 먼저 쓴다.

안녕이란 말은 왠지 하기가 싫네. 아직도 만남의 기간은 유효해. 살아있다면 부디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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