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3

220. 공책을 찢다 20230930

by 지금은

상품으로 받은 공책이 무겁습니다. 받는 순간은 공짜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추장스럽습니다.

학습관에서 강의를 듣던 중 질문에 맞는 답을 했다며 강사가 상이라며 공책 한 권을 주었습니다. 학습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하나의 방법임을 알고 있습니다. 집에 와서 펼쳐보니 별 효용가치가 없다는 기분이 듭니다. 아무 표시도 없는 백지이거나 줄만 있는 것이면 좋으련만 내게는 필요하지 않은 고등학생의 하루 계획표를 작성하는 항목들로 짜여있습니다. 해 지난 공책입니다. 전에 고등학생을 지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강사의 생각으로는 나 같은 사람도 하루의 계획표를 짜고 실행해 보라는 의미인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준 공책도 내 것과 같습니다. 주는 마음이 있으니 그냥 그 시간에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공책은 메모지 겸 이것저것 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의 기록장이 되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공책도 기록을 더 보태지 않았습니다.

나는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강의를 듣게 되면 공책을 펼칩니다. 이런 이유로 집에는 공백을 채운 공책이 여러 권 책장을 채웠습니다. 내용을 채워가는 공책도 몇 권 있습니다. 잘 정서된 것도 있지만 어느 것은 이말 저말, 이글 저 글이 어지럽게 공간을 채웠습니다. 그림도 있습니다. 낙서 수준의 그림입니다.

오늘은 별로 할 일이 없자 강사가 준 공책을 펼쳤습니다. 공책의 반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읽어가다 보니 의미 없는 내용, 필요 없는 글귀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책가방을 등에 메려다 내려놓았습니다. 이날따라 짐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내용물을 보니 몇 가지입니다. 책 두 권, 공책, 볼펜, 빈 물병입니다. 책만큼 무거운 공책을 내려놓았습니다. 대신 메모지를 넣었습니다. 나는 웬만하면 메모지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는 읽는 것으로 끝나지만 중요하다 싶으면 공책에 다시 옮기는 수고로움이 필요합니다.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메면서 그동안 기록한 공책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책은 책가방을 비롯하여 몇 개의 가방에 각각 들어있습니다. 가방이 바뀔 때마다 한 권의 공책을 이리저리 옮기는 게 귀찮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가방의 공책들을 꺼냈습니다. 생각대로 잡다한 내용의 기록입니다. 글쓰기, 책 속의 명문장, 미술, 음악, 걷거나 차 안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 낙서 같은 그림 등. 필요한 것 같으며 필요하지 않은 내용들이 공백을 메웠습니다. 이것들은 중요하다 싶어 기록했을 것 같은 데 지나고 보니 대부분 마음을 떠난 것입니다.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남겨야 할 것에 빨간 동그라미, 버려야 할 것에는 가위표, 애매한 것에는 세모를 그렸습니다. 새 공책을 펼쳤다가 덮었습니다. 무작정 쓰기보다는 나머지 공책들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마다 추구하는 목표나 내용이 다릅니다.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글쓰기의 경우 이 강의 저 강의 중에 비슷하거나 같은 문구들이 있습니다. 다른 듯 같은 내용은 합쳐야겠습니다. 당분간 지루한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내가 애를 먹고 있는 게 있습니다. 처음부터 무작정 글을 쓰는데 만 집중한 결과 많이 쓰기는 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쓴 글을 다듬고 띄어쓰기, 맞춤법, 탈자, 오자 등을 점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쓴 글을 남 앞에 펼쳐보려는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다듬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써 놓은 글을 날짜의 역순으로 되짚어가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겠습니까. 쓰는 가운데 미리미리 고치고 다듬었다면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년부터 시작된 글 다듬기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밭의 잡초를 뽑는 경우 매일 조금씩 제거하다 보면 따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어느 날 날을 잡아 한꺼번에 하려면 힘이 들고 지루함을 느끼게 됩니다. 내 경우가 그렇습니다. 공책의 정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견출지를 붙여가며 잠시 새 공책에 옮겼습니다. 지루하면 삶에 재미가 없습니다. 급하게 할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옮긴 공책을 두고 강사가 준 두껍고 무거운 공책을 찢었습니다. 공백으로 남은 공책은 메모장 역할을 할 것입니다. 낙서장도 되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주어고, 싶다면 상대방을 고려하여야 합니다.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쓰레기가 될 염려가 있습니다. 지금은 옛날과는 달리 물건이 풍부한 시대입니다. 없던 시절에는 웬만한 물건이면 요긴하게 쓸 수 있었지만, 현시대는 내 기호에 맞지 않으면 푸대접의 대상이 됩니다. 주고 싶은 마음에 선 듯 내밀었지만, 결과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주고도 욕을 먹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주고 싶은 마음을 타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잘 알고 이해하는 사이라면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받자니 그렇고 안 받자니 껄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상대에게 맞는 상품이 필요합니다. 물건을 아끼는 내가 공책을 찢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늘은 2023